너를 담았던 내 인생
퇴근 후에 오랫동안 안가던 칵테일 바를 갔다. 오랜만이라 가는 길이 어색했지만 또 익숙했다. 한때 우리의 즐거움이었는데 지금은 피할 수 밖에 없는 곳. 도착해서 익숙한 자리로 가려다 익숙하지 않은 자리에 앉았다. 칵테일 메뉴판을 보다 네가 좋아하던 러브 바이올렛에 눈길을 멈췄다.
그러다 "뭐 드릴까요? 라고 묻는 바텐더에게 그냥 맥주 한잔 주세요. 대답했다. 다시 둘러보니 달라진 것이 많았다. 바뀐 디자인에 새로운 사람들이 가득이었다. 이제 좀 지난 이야기 그냥 그저그런 평범한 사랑이야기 그런 추억에 잠겼다. 허탈한 느낌에 주문한 맥주를 홀짝였다.
"어? 오랜만이네?"
반가운 얼굴이 다가와 인사를 건냈다. 우리가 단골이었을 때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았던 사장 형이었다. 새로움 사이에 익숙함이란 참 마음이 놓였다.
"어떻게 지냈어?"
"저는 뭐 그냥,,, 일하고 그렇게 지냈죠. 형은 여전하시네요"
"좋은 뜻이지?"
유쾌하게 웃는 모습에 나도 따라 웃었다. 그러다 신메뉴가 나왔다며 급하게 주방으로 가 샌드위치 하나를 가져왔다.
"네가 또 평가하나는 기가 막히게 해주잖아 먹어보고 알려줘 봐"
"이야 비주얼은 너무 좋은데요?"
코끝을 스치는 고기향, 한입을 먹자마자 입 안에 퍼지는 치즈에 감칠맛이 났다. 그릇을 깨끗하게 비운 후 아 내가 배 고팠구나 느꼈다.
"맛있어요"
내가 먹는 모습을 보고는 뿌듯한지 미소 걸린 얼굴로 말했다.
"밥은 먹고 다녀라, 종종 와 해줄게 여진이도 좋아해 그거"
네 이야기에 흠칫 놀랬지만 놀라지 않은 척 되물었다.
"자주 와요?"
"종종 와 꾸준히 일주일에 한 두 번?"
"아,, 그렇구나. 걘 여전하네요."
너를 만나면 피해야하나 생각했다. 알고보면 여길 소개해준 것도 너였고, 네가 오자고해서 종종 왔던 바였으니까.
아니면 인사를 해야하나? 마주치면 어색하게라도 지난 연인들 처럼 안부를 물어야하나 생각했다. 그러다 부질 없는 상상같아 맥주잔을 비웠다. 일주일에 한 두 번이 설마 오늘이겠어. 오늘따라 술이 잘 들어가 한 잔 두 잔 마시다보니 취했다. 섞어 마셔서 그런가 괜히 기분이 좋고 세상이 핑핑 도는게 분명 제 정신은 아니었다.
눈을 떠보니 찰랑거리는 보라빛 액체에 와인 잔, 그 안에 체리, 반쯤 마신 러브 바이올렛이 있었다.
"어,, 러브 바이올렛이네"
"깼어? 우리 2차 갈래?"
여진이었다. 난 네 물음에 항상 그렇듯 그래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끊겨 중간중간 머릿 속에 있는 기억에 아마 우리가 근처 포차를 갔지, 가서 예전처럼 많이 웃은 것 같은데 뭐가 그렇게 즐거웠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어제 밤에 기억나는 건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것 같았다. 평소와 같이 별것도 아닌 일에 서로 웃으며 대화하고 그러다 깊은 이야기를 하게 되고
아 생각났다. 우린 사랑이야기를 했었다.
네가 물었던 질문에 대답을 했었다.
"사랑이 뭐냐고 물은 적 있잖아, 내가 곰곰히 생각 해봤거든 나는 마냥 좋은 것 같진 않아. 널 보면 계속 마음이 아파"
그때 네가 뭐라고 했었나 이야기를 하고 씁쓸하게 웃은 것 같은데 그러고 진짜로 기억이 안난다.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직 울리지 않은 알람에 시간을 한번 보고 물 한 잔 마셔야겠다 생각하고 주방으로 갔다. 거기에 또 네가 책을 읽고 있었다.
"일어났어? 꿀 물 마셔. 아니 넌 왜 집 냉장고가 텅텅 비었니?"
잠이 덜 깼나 술이 덜 깼나 뭔가 싶은 어벙벙한 얼굴로 어정쩡한 걸음으로 꿀 물을 들었다. 답답함에 벌컥벌컥 마신 후 여진이가 읽고 있는 책을 봤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쓱 보더니 말을 했다.
" 아 내가 예전에 선물해준 책 아직 있길래 다시 봐도 재밌네"
처음 펼치면 나오는 빈 공란에 적혀있는 편지,
난 그 페이지를 떠올렸다.
넌 그런 페이지였다.
제일 재밌는 페이지, 나에겐 네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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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좀 달라, 난 사랑을 하면 강해져. 힘든 일이 있어도 힘이 나. 그래서 같이 있는거야, 사랑은"
"그럼 날 왜 떠났는데?"
"난 너랑 같이 있으면 강해지는데, 넌 아닌 것 같아서. 그래서 그런 너를 보는게 내가 힘들어서"
"…같이 있는거라며"
떨리는 목소리, 촉촉한 눈가로 이야기하는 너를 괜히 안아주고 싶었다. 내가 이기적이라 정반대인 네가 힘들어하는 것 같아 그래서 그만둔 건데 욕심을 내고 싶어졌다. 끝까지 이기적으로 굴고 싶어졌다.
지키고 싶었다 아직 꺼지지 않은 사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