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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가 매일 사랑을 하는 것은 인생의 고통을 상쇄시키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일종의 진통제 같은 것이니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
그래서 더 사랑하고 싶어 하고,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잠깐의 순간 고통을 잊을 때면 평화가 찾아와 중독성이 강한 것.
나에게는 지켜내고 싶은 것이 사랑이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것이 더 쉽기에 그 마음을 지켜내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고통만큼의 깊은 사랑이 남으니 마음껏 사랑하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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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은 그늘에서 자라나는 새싹이었다. 현은 햇빛을 비춰주는 거울. 추운 그늘 속이지만 거울의 도움을 받아 한줄기의 빛을 받았다. 그때 따스함을 처음 느꼈다. 햇빛을 간접적으로 받았지만 집중적으로 받을 수 있었다.
현은 원이 너무 뜨거워할 때면 잠깐 쉬어갔다. 늘 원을 바라보고 있기에 원이 어떤 날에 힘들어하고 즐거워하는지 알았다. 원도 늘 햇빛을 온전히 주는 현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위해 늘 빛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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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이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나가는 일상을 마쳤다. 하루 종일 먼지와 사람들 속에서 몸을 바삐 움직이다. 늘 힘줬던 입꼬리에 이제야 힘을 푼다. 왜 하필 지금 비가 오는지, 반바지와 샌들을 신었지만 축축해지는 건 영 찝찝한 일이다. 우산을 툭툭 털고 접어 지하로 내려가기 위해 계단을 이용한다. 1시간이 훨씬 넘는 귀가 시간. 습기가 가득 차고 사람이 많은 지하철에 몸을 구겨 넣는다. 이어폰에서는 노래가 흘러나오지만 이것은 마음이 처지지 않기 위해 듣는 노래. 얼른 집에 얼른 가서 밥을 먹고 씻고 싶은 마음뿐이다. 집에 도착하면 저녁 8시. 배가 고파 헐래 벌떡 저녁을 준비한다. 밥을 먹고 조금 쉬고 싶지만 설거지를 빨리하고 샤워를 마쳐야 편한 마음으로 전화할 수 있다. 밤 10시면 늘 그렇듯 전화를 한다. 원이 오늘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 잘 지냈을까, 힘든 일은 없었나, 즐거운 일을 많이 찾아다녔나, 궁금하기에 오늘도 어김없이 전화를 건다. 피곤함을 참으며 전화를 거는 것이 현의 사랑.
원과 현은 너무 다른 사람. 현은 반복 되는 일상에 평온함을 얻는 사람, 원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는 사람. 다름에 이끌려 현은 원의 이야기에서 즐거움을 찾고 원은 현의 일상에서 안정을 찾는다.
원은 오늘 무섭게 내리는 비에 집에서 가만히 책을 읽었다고 한다. 더위와 비를 뚫고 밖으로 나가기보단 시원한 에어컨을 즐기는 쪽을 선택했다고, 빗소리를 들으며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셨다고 한다.
어떤 책을 읽었냐고 물어보니 지독한 사랑에 관한 책이라고, 사랑에 대해 묻는 책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며 두 주인공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결말이라 불안하다고 했다. 우리가 하는 사랑도 소비기한이 있으면 어쩌냐고 걱정하고 있었다.
그럴 때면 현은 원을 진정시키는 역할이었다. 우리는 충분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고 이야기해 준다. 함께 있진 않지만 등을 토닥이듯 말로 마음을 토닥여준다. 원은 현의 평온함에 물들어 금세 안정을 되찾는다.
원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불안해서 자꾸 움직이려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매일매일 바쁘게 지낸다. 책 속으로 도망가기도 하고 글을 쓴다고 푹 빠져 시간을 소비한다. 걱정과 불안이 쌓일 때면 산책을 나가 버리고 오기도 하고 산책으로 해결 못할 큰 고민이 생기면 갑자기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원의 집에는 책장에 책이 넘쳐 책장 위 한가득 책이 쌓여있고 어딘가에서 가져온 물건들이 방을 다채롭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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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은 새싹, 현은 거울. 원은 현의 햇빛에 보답하듯 무럭무럭 자랐다. 두 개의 떡잎 위에 잎들이 패스츄리처럼 겹겹이 쌓여갔다. 새싹의 키는 점점 더 커지고 줄기의 두께는 점점 더 두터워졌다. 현은 원이 자라날수록 어떤 것의 새싹인지 궁금했다. 다 성장하면 어떤 모습일지 애정을 가지고 지켜봤다. 여리고 어릴수록 지켜봐 줘야 하는 것. 재촉하기보단 함께 있어주는 것. 그것이 현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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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밖을 나갈 때도 두 사람은 다르다. 현의 가방은 지갑과 손수건. 여름이면 손선풍기 하나, 겨울이면 핫팩이 추가되는 정도. 원은 가방 한가득 챙겨 나오는 편인데, 다 필요한 것이라며 들고나가 쓴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현은 그게 원의 마음에 안정을 준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너무 무거워하면 자기가 들어주면 된다고 그렇게 원의 불안감을 나눠서 들며 원이 조금 더 자유로운 모습을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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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의 잎들이 무성하게 자랐다. 조금 더 넓어지고 잎의 너비가 넓어졌다. 자라나는 모습에 현은 뿌듯함을 느낀다. 여전히 원은 현을 바라보고 있다. 조금씩 성장하면서도 현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원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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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은 현의 눈을 보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갈색 빛 도는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안정감을 느꼈다. 깊은 눈동자에는 정심의 힘이 있다. 오랜 시간 만나 오면서 얼굴에 난 점도, 머리의 가르마도, 옷 스타일도 바뀌었지만 눈동자는 늘 여전했다. 불안감 속에 사는 원은 변하지 않는 것을 찾는 습관이 있다.
원은 현이 자신을 보며 접히는 눈꼬리와 올라가는 입꼬리의 호선에 깊은 애정을 느꼈다. 원이 늘 보는 현의 얼굴은 그랬다. 현은 원이 눈물을 뚝뚝 떨굴 때도, 신나서 웃을 때도, 놀라서 눈이 동그래지거나 화나서 눈썹이 올라갈 때도 빠짐없이 다 보았다. 그래서 억울함도 있었다. 모든 감정을 숨김없이 보여주는 원은 현의 모든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슬픔을 감추고 불안감을 숨기는 것이 현의 사랑. 원의 불안감이 더 커질까 걱정시키기 싫은 마음. 이해하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 현이 우는 모습을 보면 원은 당황할까, 당황하면서도 같이 울어주겠지. 슬픈 그 마음을 온전히 느끼겠지. 같이 울어주는 것이 원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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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은 잎들을 마구 뻗쳐나갔다. 갑자기 태풍이 분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제 막 자라나기 시작한 새싹인데 현은 원이 잘 버텨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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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연락이 왔다. 원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 집 2층에서 살아온 원. 서울에서 마산으로 내려갈 때면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기 위해 꼭 들릴 만큼 사랑을 주고받으며, 아니 준 것보다 훨씬 큰 사랑을 받았다고 했다.
급하게 마산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고, 가는 길 내내 숨죽여 울었다고 했다. 걱정이 된 현은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원이 다시 품으로 돌아오면 맛있는 것을 같이 먹어야지. 조금 더 신경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원의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현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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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세상을 휩쓸고 지나간 후, 햇빛이 나타났다. 원의 상태는 말도 아니었다. 잘 자라나던 잎들이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잎에서는 검은 반점들이 생겨났다.
햇빛을 원에게 비추지 않는 동안 현은 원을 바라보았다. 원의 아픔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다. 현은 원에게 어떤 애정을 줘야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햇빛이 부족한가 싶어 자신이 매일매일 조금씩 더 움직여 햇빛을 비춰주려 했다. 사랑을 주고 싶어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이 현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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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을 하는 동안 원은 계속 힘겨워했다. 적응을 잘하는가 싶었지만 계속해서 떠오르는 생각들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손을 열심히 움직여보지만 노력이 부족했는지, 마음이 불편한 것이 잘 보였는지 권고사직을 받았다. 처음에 권고사직을 받았을 때는 당황했지만 한편으로 좋았다고 했다. 그래서 알겠다고 하고 짐을 챙겨 곧장 나온 원은 해방감을 느꼈다. 시간이 생겨 현이 보고 싶어 졌다. 보고 싶으면 찾아가는 것이 원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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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은 아픔을 이겨내고자 쉼을 선택했다. 한동안 잎의 성장을 멈추고 몸에 난 검은 반점들을 지우기 위해 애썼다. 현은 원에게 아무 말 없이 묵묵하게 지켜보며 빛을 더 많이 비춰주었다. 드디어 반점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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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은 가고 싶던 강화도 여행을 혼자 다녀왔다. 10일 동안 가는 긴 일정이었다.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서 모든 자극을 받아들였다. 다양한 것을 경험하며 새로운 기억들로 가득 채웠다. 일을 하며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를 여행에서 받은 사람들의 사소한 친절들로 기억을 덮어썼다. 여행에 돌아와서는 읽고 싶던 책을 마음껏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회사에 다니는 것도 버거워 제대로 하지 못한 요가도 하고, 직장인일 때 바쁜 일상에 끼니를 때우기 위해 식사를 해치웠다면 이제는 여유롭게 요리도 해 먹었다. 자기 자신을 조금 더 사랑하는 방법을 알게 된 듯 보였다.
주말이 되어 둘이 시간을 보낼 때, 현은 원에게 온기를 채워줬다. 포근하게 안아주기도 하고 신경 써서 요리를 해 먹이기도 했다. 원하는 곳을 데려가기도 하고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게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 이것이 현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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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아예 지울 순 없지만 검은 반점들은 사라졌다. 반점을 지우기 위해 애썼던 에너지들을 돌려 잎을 다시 자라게 했다. 조금 다르게 자라난 잎. 이번엔 연한 초록빛 뾰족한 모양으로 생겨났다. 현은 원을 바라보며 새로운 잎이 자라난 것에 관심을 가졌다. 오밀조밀 모여 자라난 잎들 그 사이에서 샛노란 색이 영글었다. 현은 그 노란색에 눈이 자꾸만 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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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겪으면 사람이 성숙해지는 걸까. 원은 신기하게도 이전보다 안정적이었다. 쉼 없이 늘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원이었는데 이제는 쉼의 여유를 만들어 놓는다. 무언가를 해야만 조금 더 편해지는 성격이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보였다. 차분함과 여유로움을 현에게서 배운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을 닮아가는 것이 원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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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였다. 노란 꽃이 만개했다.
여전히 원은 현을 바라보고 현은 원에게 햇빛을 비춰준다.
이것이 둘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