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갚지 못할 사랑

할아버지의 사랑

by 지원

매섭고 찬 바람이 부는 날일수록 저는 따뜻한 사랑이 생각납니다. 반대가 끌리는 것일까요. 늘 사랑을 생각하지만 오늘따라 더 깊이 생각이 나는 것일까요. 저에게는 평생 갚지 못한 사랑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세상 밖으로 나와 이제 막 울음을 터뜨렸을 때부터 그 사랑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아니죠. 아마 제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윗집에 살았습니다. 그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산호시장의 오래된 야채가게를 운영하고 계셨습니다. 매일 새벽같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가게 문을 열고 저녁 무렵 지친 어깨로 집에 돌아오면 손부터 씻었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저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고 있는 저를 보기 위해서라죠. 피곤함을 넘어선 사랑이었습니다.


아침을 알리는 시계처럼 같은 시간에 가게를 운영해도 저녁이 되면 제가 있는 2층으로 계단을 타고 올라오셨습니다. 그런 사랑을 받으며 저는 옹알이도 하고 앉기도 하며, 많은 격려와 애정을 받았습니다. 그 응원에 힘입어 걸어 다니며 결국은 뛰었겠죠.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할 때쯤 주말엔 할아버지 오타바이의 뒤에 앉착되어 있는 바구니를 타고 야채가게에서 퇴근을 했습니다. 동생과 같이 좁은 바구니를 나눠 앉은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록합니다. 할아버지 품에 안겨 있다 오토바이에 올라타는 순간은 무서웠지만 할아버지와 함께 거리를 달리는 순간은 즐거웠습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빠르게 달리는 탓에 2차원적으로 보이는 세상이 좋았습니다. 제가 바구니에 들어가지 못하는 나이가 되고 아버지의 사업으로 집을 이동하여 세상에 적응하기 애쓰는 동안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주름이 더 늘어나고 손도 더 투박해졌습니다. 허리는 점점 굽어지고 머리는 눈이 소복이 쌓인 한 겨울처럼 새하얘졌습니다.


그전보다 자주는 아니지만 어쩌다 한 번씩 찾아간 주말에 할아버지는 어느 때와 같이 밝게 웃으시며 반겨주셨습니다. 늘 보고 싶어도 자주 보지 못한 얼굴이 전혀 서운하지 않다는 듯이 깊은 주름을 보이며 저를 토닥여주셨습니다.


그런 날이면 할아버지는 오토바이를 타고 옛날 통닭을 사 오셨는데요. 걸어서 5분 거리, 가까운 곳에도 옛날 통닭 가게가 있지만 굳이 오토바이를 타고 멀리까지 다녀오신 까닭은 아마 손녀에게 자신이 아는 가장 맛있는 통닭을 먹이기 위해서였겠지요. 저는 옛날통닭을 보면 할아버지의 깊은 사랑이 생각납니다. 이제 더 이상 그런 통닭을 맛볼 수 없다는 생각에 애달픔만 끓어오릅니다.


시간은 붙잡을 새 없이 흘러갔습니다. 할아버지의 거동이 어려워지고 병원 침대에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아픔을 함께 짊어질 수 없었습니다. 더 가늘어진 팔과 다리를 보며 온기가 아직 남아있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추는 선택 밖에 할 수 없었지요. 그러다 결국 할아버지가 눈을 감은 날엔 저는 믿기지 않은 사실을 받아들이며 울 수밖에 없었죠.


사랑은 참 양면적인 것 같습니다. 사람을 살고 싶게 만들다가도 무력하게 만드는 것 또한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는 갚지 못할 사랑. 넘치고도 풍족한 사랑 덕에 제가 이렇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겠죠. 너무나도 큰 사랑을 받았단 생각에 가슴이 뜨겁다 못해 터질 것 같은 순간들이 일상에 문득문득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아픔은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다 한 번씩 꺼내보는 것. 그 기억과 감정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문득 떠오른 감정, 갚지 못할 사랑을 되새김질하며 기록으로 남깁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건넬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표현하며 오늘도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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