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에서 출발했던 나는 이제 남편의 회사가 있는 우시로 도착했다. 우시 호텔은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은 '감옥 같은 곳'이었으니까..
뜯어진 벽지와 커튼, 더러운 방, 남겨진 쓰레기, 침대 시트에 있는 머리카락들, 베개는 노숙자가 며칠 베고 잔 것처럼 냄새가 고약했다. 잠시 이 침대에 눕지 않고 잘 수는 없을까 쓸데없는 고민을 해봤다. 하지만 나는 결국 이 좁은 방안에서는 오갈 데가 없어서 14일 동안 이 침대와 거의 한 몸처럼 지냈다.
이곳 격리는 시작할 때 관계자들과의 단체 메시지 방이 개설된다. 채팅으로 필요한 것을 요청하거나 검사 안내, 공지사항 등을 공유한다. 격리된 모든 사람들이 다 한 채팅방에 있는데 한국인들은 중국어도 부족하지만 괜히 말했다가 불이익을 당할까 봐 아무 말은 못 했지만 다수의 중국인들의 숙소에 대한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방역당국에 직접 연락해 방을 바꾼 사람도 있었는데 과연 이 시설에 더 나은 방이 있었을까?
중국인들조차 불만이 넘치던 도시락
하루 세 번 나오는 도시락은 정말 돈 주고는 안 사 먹을 음식들이었으나 이렇게 먹다가는 병 걸릴 것 같다고 과일이나 요거트도 안 준다고 항의해준 몇몇 중국인들 덕분에 어느 날인가부터는 사과나 귤도 종종 제공되었다. 사과 알레르기가 있는 남편은 종종 본인 사과를 내 방문 앞으로 굴려주기도 했는데 처음엔 엉뚱한 곳에서 나뒹굴던 사과 굴리던 실력은 점점 향상되었다고...
좁은 방에서 아이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지만 나름대로 홈트도 하고, 줄넘기도 하고 운동을 하려고 노력했다. 내 몸 하나는 침대에서 안 떨어지고 24시간 있을 수 있었지만 아이는 그럴 수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됐으니까.
남편이 혼자 외롭고 지루할 거라고 걱정하는 친정 부모님의 걱정은 "그 사람이 여기서 제일 상팔자야!"하고 단숨에 잘라버렸다. 먹이고 재우고 씻기고 입히고 틈틈이 공부도 시키고 하는 일은 오롯이 내 일이었으니까.
그중에서 제일 힘든 건 놀아주기.
모래놀이까지 가져와서 여행가방에 쏟아 놀게 해 줘도 아이는 같이 놀자며 줄기차게 졸랐다. 종일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는 남편이 지금 이 순간은 가장 부러웠다. 대신 나는 남편에게 아이와 놀아주는 내 사진을 계속 보내면서 격리 해제되면 이제 아빠가 놀아줘야 한다는 것을 계속해서 어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