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y long enough to experience a new way of living.
Challenge the picture the media paints. Test your limits. Evolve.
Forever change your life.
Come home to inspire others.
불혹의 나이에 미국으로 온 가족이 이사를 왔다. 길어야 3~4년 살 줄 알았는데 어느덧 5년이 넘게 미국이란 나라에서 살고 있다. 그동안 주변에서 꽤 많은 이민자 가족들, 한국 가정들을 만났지만 부부 모두 나이 마흔이 넘어 미국으로 온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한국의 안정적인 직장을 뒤로하고 온 경우는 더욱 없었다. 늦어도 서른 이전에, 한국에서 뚜렷한 직업을 갖기 전에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공립학교 교사로서, 남편은 대기업 연구원으로서 어느 정도 탄탄한 앞날이 보장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더욱이 미국에 가기 직전 나와 남편은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승진에 대한 가능성이 아주 높은 상태였다. 나는 교사에서 교감, 교장이 될 수 있는 확률이 꽤 높았고, 남편은 연구원에서 팀장으로의 승진을 코 앞에 두고 있었다.그러나단 한 번의 기회, 남편이 미국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제안을 받고 나서 큰 고민 없이 미국행을 선택했다. 우리 부부는 둘 다 마흔이라는 나이, 결코 적지 않은 나이였다. 왜 미국으로 가는 것을 선택했는가.
도망일까, 도전일까
공립학교에서 교사가 교감, 교장으로 승진을 하기 위해서는 승진 점수라는 것을 차곡차곡 모아야만 한다. 근무 연한뿐만 아니라, 연구학교 근무, 보직(부장교사) 기간, 연구대회 입상, 대학원 학위 등 모든 것들이 촘촘하게 점수화되어 있으며 상대적인 서열을 기준으로 상위 3~5% 안에 들어야 승진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어떻게 하다 보니 승진점수를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많이 모았던 나는 승진욕구(!)가 높았던 동갑내기 동료 교사로부터 직접적으로"니 점수가 부럽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지금도 가끔씩 듣는 말, 미국 갈 때 승진 점수 아깝지 않았어? 물론 나도 서열문화 속 한국 사회에서 승진에 관심 많은 교사 중 한 사람이었다. 승진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 논문 '한국의 교사들은 왜 교장이 되고 싶어 하는가'를 썼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초등의 승진 문화는 어이없을 때가 많았다. 윗분들에게 잘 보이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들이란. 평교사였던 연세 지긋한 한 선배 선생님은 그 모습들을 "너무 남사스럽다."는 말로 표현하셨다. 어느 날, 남편이 미국에서 일할 기회가 생겼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이번이 처음이자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기회를 잡자.벗어나 보고 싶었다.
독 될까,득될까
치밀할 정도로 모든 것에 서열이 매겨지고 순위에 집착하는 서열주의가 사회 전반에 깔려있는 한국에서 나는 그래도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아왔다. 대입도 임용고사도 재수 없이 한 번에 붙었고, 어릴 적 꿈이었던 교사의 꿈도 이루었다. 교사로서 18년 간 살아오면서 9년 동안 대학원에 다녔고 박사학위까지 취득을 했다. 승진점수도 거의 다 채운 상태였다. 이런 내가 나이 마흔에 외국으로 떠난 것은 나의 커리어에 독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맞벌이 부부의 수입은 반 이하로 뚝 떨어졌으니 통장 계좌가 허전해진 것도 안타까운 사실이었다.
미국에 와서 한 6개월 정도는 지독한 적응기간을 경험했다. 집단주의적인 한국에서만 사십 년을 산 나는 미국이라는 개인주의적 사회가 왠지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냥 한국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일 년 정도가 지나고 나니 미국에서 새롭게 시작된 삶이 점점 축복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수행원 없이 혼자 가방 들고 행사장에 일찌감치 와서 연설 준비를 하는 시장님을 보며, 대학교수 은퇴 후 외국인들을 위한 무료 영어교실을 운영하는 부부, 일보다는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보내는 것을 선택한 나보다 열 살 많은 내 친구를 보며 이곳에 잘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에서 님으로
미국은 참으로 넓고 거대한 나라, 도시보다는 시골이 훨씬 많은 나라다. 미국의 많은 지역 중에서도 시골에서만 살고 있는 우리 가족은 한국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소소한 일들을 많이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한국에서는 아파트에서 오래 살았었기에 물리적으로 이웃들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음식 한번 제대로 나누어 먹어본 적도, 차 한잔 마주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도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시간을 갖기에 나는 너무 바빴고 개인생활보다는 사회생활이 더 중요했다.
지금의 나는 한국에서는 도저히 시간이 없어서,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할 수 없었던 것들을 가능한 한 많이 하고 있는 중이다. 나보다 나이 많은 미국 친구와 평일 오전에 만나 차 한잔 놓고 수다 떨기, 교사로서의 재능을 살려 한국어 가르쳐주기, 학교에서 자원봉사하기, 빵이나 떡을 만들어 주변 이웃들과 나누어 먹기 등등. 돈으로는 살 수도 얻을 수도 없는 경험들을 통해 그동안 멀기만 했던 미국이 조금씩 가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낯설고 다르게만 느껴졌던 미국 친구들과도 친밀한 감정을 나누는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었다.
짐 대신 힘을
미국에 오고 나서부터는 알 수 없는 자유로움과 해방감이 들 때가 있다.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지 생각해 보고 떠올린 단어는 하나, 체면이라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체면이 중요했다. 서열과 위계질서를 강조하고 명분을 중시하는 유교적 전통은 한국인의 사회적 지위나 신분과 관련된 체면 유지를 중시하게 만들었다. 나 또한 한국의 교사로서 체면이라는 것을 중요시하며 살아왔다. 무지외반증이 있어서 구두를 신으면 안 된다는 의사의 경고를 받았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강의를 할 땐 으레 구두를 신고 정장치마를 입었다.
지금의 나는? 절대 구두를 신지 않는다. 내 소중한 엄지발가락이 더 이상 휘어지지 않도록 무조건 운동화, 그것도 볼이 넓은 남성 운동화만 신고 있다. 치마도 안 입은 지 오래되었다. 몇 년 전, 남편 직장에서 있었던 큰 연회 때 멋을 내고자 치마를 입은 적이 있긴 하다. 그때를 제외하곤 나의 복장은 청바지 또는 운동복 바지가 대부분이었다. 체면을 내려놓으니 내 삶은 더 자유로워지고 다양해졌다. 사회적 지위나 나이에 따른 호칭 없이 이름만 부를 수 있는 문화 속에서 타이틀의 무게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인종, 나이, 직업이 전혀 다른 다양한 사람들과 친구가 되며 삶의 힘을 얻고 있다.
미국은 내게 도망이 아닌 도전, 독이 아닌 득, 남이 아닌 님, 짐이 아닌 힘이 되기를, 꼭 그리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은 미국에서의 삶을 선택했지만 나중에 또 어떤 기회로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40년 간 살았던 나는 그 기간의 반의 반의 반 밖에 살지 않은 이곳 미국에서의 삶이 문득 낯설 때가 있다. 어떨 땐 가끔 한국으로 당장 돌아가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는 것에 대한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더 늦기 전에 인생에서 한 번쯤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고 싶었다. 중년의 나이에 외국에서 살아보는 경험은 미루어 짐작했던 것보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내게 주고 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돈이나 물질적 혜택 같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모든 것들은 직접 경험해 보기 전까지는 알 수도 느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오늘도 나는 미국의 어느 작은 마을에 있는 새로운 삶의 터전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도전하고 배우고 어울리며 힘을 얻는 나날들을 보내며 살고 있다.
모쪼록 나중에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흐뭇하게 미소 짓는 내 모습이 될 수 있도록 지금의 삶을 잘 살아내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