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온 이후 오히려 영어보다 한국어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면서 띄어쓰기의 중요성에 대해 새삼 느끼고 있다. 우리말에서는 띄어쓰기에 따라 말뜻이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쉽게 쓰는 문장도 띄어쓰기 하나 차이로 어마어마한 의미의 차이가 생길 수 있으므로 주의를 해야 한다.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 (정상적)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 (비정상적)
사랑해 보고 싶어. (커플의 대화) 사랑 해보고 싶어. (솔로의 희망사항)
어서 들어가자! (함께 들어가자는 의미) 어서 들어가 자! (방에 가서 잠을 자라는 의미) 어서 들어! 가자! (무언가를 들어서 가자는 의미)
마흔 줄에 접어들고 나서 고민하고 있는 것 중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내용은 결국 어떻게 하면 '잘살 것이냐' 또는 '잘 살 것이냐'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잘사는 것과 잘 사는 것도 띄어쓰기 하나 차이인데 엄청난 의미의 차이를 보인다. 띄어쓰기 없이 '잘살다'는 '부유하게 살다'라는 의미를 지니지만, 띄어쓰기를 한 '잘 살다'는 '아무 탈 없이 편하고 순조롭게 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잘살다. (한 단어로 굳어진 합성어, '부유하게 살다'라는 뜻)
- 돈을 많이 모아서 잘살고 싶어요.
- 내 친구는 사업을 해서 잘살게 되었다.
잘 살다. ('살다'에 '잘'이 꾸미는 형태, '아무 탈 없이 편하고 순조롭게 살다'라는 뜻)
- 아들이 잘 살기를 바랄 뿐이야.
-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잘 사는지 궁금해.
아마도 모든 이의 바람은 금전적으로 잘살면서 동시에 편하고 순조롭게 잘 사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두 가지를 모두 취하는 것이 어렵다면, 둘 중에서 어느 것 하나를 우선순위로 택해야 한다면 전자여야 할까, 후자여야 할까.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돈 나고 사람 나지는 않았지만, 돈이 있어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는 법, 잘사는 것이 잘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철없던 시절, 부잣집 친구네가 부러웠던 적도 있었고 명품백을 자랑하는 친구를 보며 나도 하나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았던 이십 대 때는 잘 사는 것도 좋지만 일단은 잘사는 게 더 중요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이를 어느 정도 먹고 난 지금은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돈이 많아서 잘사는 사람도 건강이 안 좋아서, 가족과 사이가 틀어져서, 곁에 좋은 친구가 없어서 잘 살지 못한다면 결국 불행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어찌 보면 잘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1~2억만 있어도 잘사는 것 아냐? 생각했는데, 이제는 어림 턱도 없어져 버렸다. 부동산이 급등하고 상대적으로 월급은 초라해지면서 5억, 아니 10억 이상은 있어야 부자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올 12월 초에 나온 ‘2022 한국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금융자산 10억 원 이상을 보유한 개인은 지난해 42만 4천 명으로 국내 인구의 0.82%에 불과하다. 흔히 들을 수 있는 10억 모으기는 현실적으로정말 어려운 목표, 대박 행운 없이는 이룰 수 없는 목표가 아닐까.
잘사는 것은 상대적인 비교로 그 기준이 달라지는 탓에 도달이 결코 쉽지 않다. 현금 1억이 있다고 할 때 어느 나라의 누구한테는 잘살기에 충분하고 남을 정도의 큰돈이 될 수도 있지만, 다른 나라의 누구한테는 그 돈으로 무얼 하려고? 작은 집 한 채도 살 수 없고! 하는 정도의 적은 돈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잘 사는 것은 자기 자신의 기준으로 그 내용을 규정할 수 있고 생각하기에 따라 언제든 도달이 가능하다. 가족과 사이가 좋고, 운동과 독서로 건강한 몸과 마음을 유지하고 있으며, 좋은 친구들이 주변에 많다면 비록 부유하지는 않아도 아주 잘 사는사람일 것이다.
어느덧 중년이 되어버린 나는 잘살기보다는 잘 살기를 택하련다. 도시에서 생활을 할 땐 주변에 온통 잘사는 사람들만 많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파트 평수, 차종, 직급에 따른 호칭과 연봉으로 어느 정도 잘사는지가 쉽게 비교되는 것만 같았다. 이제 시골에서 생활을 하다 보니 부유하게 잘사는 사람들이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아마도 어딘가에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저 소박한 일상에 특별함을 더하고 소소한 생활을 즐기며 잘 사는 사람들이 주변에서 눈에 많이 띈다. 아마도 이는 도시생활과 시골생활의 차이겠지?
올해를 마무리하면서 남은 해를 잘 보내고 내년에도 올해처럼 무탈하게 잘 살 수 있기를 바라본다. 아무 탈 없이 편하게 순조롭게, 잘 살아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