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t cry over spilled milk. It could have been beer!
미국에서 산 지도 어언 4년이 넘게 지났다. 사십 년을 한국에서 살다 왔으니 이제 한국에서의 삶 약 10%에 해당하는 삶을 미국에서 산 셈이다. 한국에서는 어린 시절, 학창 시절, 청년 시절을 모두 포함해서 사십 년이지만 미국에서의 삶은 온전히 중년의 삶이었다. 인생의 중반기에 경험하고 있는 미국 생활이 내겐 전부이다.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나이, 불혹에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더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 같다. 길지 않은 시간, 4년에 불과한 미국에서의 삶이었을지라도 결코 짧지 않은 기간으로 느껴진다. 그동안 많은 생각과 경험을 준 시간이었다. 한국과는 전혀 다른 미국에서의 삶은 여러 가지로 참 불편하기도 하고 편하기도 하다.
일단 불편한 점을 꼽자면 끝도 없을 것 같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가 아니어서 불편한 것은 두 말하면 잔소리요, 입이 아플 수도 있다. 중년의 나이에 처음으로 외국 생활을 해 보는 것, 그 자체가 불편함이다. 미국은 대중교통 이용도 불편하고(소도시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동네 마트를 이용하는 것도 불편하며(반드시 차를 타고 몇 분 이상 가야 한다), 병원을 이용하는 것도 불편하기 짝이 없다(또한, 비싸다).
모국어가 아닌 영어는 미국에 살아도 왜 그리도 안 느는지. 중년이라 안 느는 것인지, 나만 안 느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중년이라 그렇다고 하고 싶다. 새로 사귄 미국 친구들과는 늘 영어로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것이 불편하고 다른 나라라는 낯선 환경은 종종 나를 불편 플러스 불안하게 만들기도 한다. 늘 그리운 부모 형제, 친척, 오랜 친구들을 만날 수 없어 불편하고 아쉽고 때론 외로운 것은 당연하다.
온라인이 발달한 요즘이지만, 한국의 정반대 편에 있는 미국은 시차도 엄청나게 달라서 시차를 따져서 한국과 연락을 해야 하는 것도 불편한 것 중 하나이다. 여유로운 일요일 오후에 한국으로 전화 좀 드려볼까? 하면 한국은 정신없이 바쁜 월요일 아침이 된다. 가끔 오랜만에 한국에서 걸려 온 부재중 통화는 이곳의 새벽시간을 가리킬 때가 많다.
불편한 점이 너무 많지만 미국이라 편한 점도 많다. 어차피 기왕 미국에서 살게 된 거 편한 점을 생각해 보면서, 편한 점을 누리면서 생활하는 게 현명할 듯싶다. 나중에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게 되었을 때 미국 생활을 추억해 보며 '그땐 그게 편했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마도 그럴 것 같다.
비교하지 않는 문화가 편하다.
한국에서 사는 동안은 비교를 당하기도 하고 비교를 해야 할 수밖에 없는 문화가 항상 있었다. 성적, 나이, 직업과 직급을 비교하는 분위기는 늘 내 주변에 있었다. 학창 시절에는 성적으로, 교사가 되고 나서는 연공서열로 비교가 되었다. 교대 학번으로 위아래가 구분되고, 승진 여부에 따라 대우는 많이 달라 보였다. 교사 경력이 쌓이면서부터는 승진 점수로 한 줄이 매겨지는 문화가 계속 나를 쫓아다녔다.
미국은 좀 달랐다.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이기에 한 나라에 아주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집단들이 함께 한다. 물론 그 속에는 명문-비명문, 선호-비선호, 주류-비주류 등의 많은 개념이 존재하지만 우리나라와 큰 차이가 있다면 하나의 서열화된 기준으로 비교하는 문화가 훨씬 약하다는 것, 윗사람을 웃어른으로 모시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에서는 대학 여부 상관없이 큰 성공을 하기도 하고 비선호 직업도 월급을 많이 받는 경우를 볼 수 있었다. 가족 행사장에 아무런 의전 없이 혼자 가방 들고 와서 연설하고 사라진 시장님, 정년퇴직 후 외국인들을 위한 무료 회화 교실을 열어 준 전직 교육학과 교수님, 교사 연구실보다 더 작은 교장실에서 일하며 교사보다 더 바쁘게 뛰어다니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그동안 이 세 분을 만나 보면서 비교하지 않고 위아래를 잘 따지지 않는 문화를 느낄 수 있었다.
마음껏 숨 쉬며 다니기가 편하다.
한국에서 사는 동안은 가까이에 모든 편의 시설이 있었다. 걸어서 마트도 가고, 약국도 가고, 빵집도 가고 참 편하고 편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밀집해서 살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미국에서는 어딜 가는 것이 정말 불편하다. 반드시 차를 이용해야 하기에 차는 마치 발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모든 것이 띄엄띄엄 있다는 것은 그 사이사이에 녹색환경이 함께 한다는 의미와도 같다.
미국의 곳곳에는 많은 나무와 잔디가 함께 한다. 멀지 않은 곳에는 늘 지역 공원이 있고 걸어 다니며 산책할 수 있는 트레일, 하이킹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지역 공원이라 하더라도 규모가 꽤 크고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 보여도 한국의 기준으로는 아주 적은 편에 속한다. 또한, 도시의 공기의 질도 항상 좋은 편이다. 대도시나 산불이 잦은 캘리포니아는 상황이 좀 다를지 모르겠지만 미국의 기준은 소도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미국 도시는 인구 몇 만 명 이하의 소도시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봄이 오면 아침마다 미세먼지 확인하는 게 일이었다. 기관지가 약한 나는 미세먼지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일 년에 한두 번씩은 목감기가 엄청 심하게 와서 급히 병원에 갈 수밖에 없었고 수업을 못하기도 했었다. 미국에 와서부터는 미세먼지를 신경 쓰거나 그로 인해 고생한 적이 없다. 운동은 싫어해도 걷기는 좋아하는 내게 늘 가까이 있는 지역 공원에서 걷는 일은 편안함과 작은 위안을 주곤 한다.
친하고 싶은 사람과 하고 싶은 말만 해서 편하다.
영어는 평생의 숙제와도 같다. 미국에 오면 영어가 잘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중년에 오면 더 안되고 노년에 오면 더욱더 안된다는 데 한 표를 던진다. 비약할 만한 발전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씩 영어가 늘고 있다고 믿는다. 아마 영어 실력 자체가 는다기보다는 영어 환경에 대한 적응력, 눈칫밥이 늘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미국에 와서 만나는 사람들은 당연한 말이지만 모두 새로운 사람들이다. 한국에서 알던 사람은 우리 가족이 전부이다. 새롭게 만나고 사귀게 되는 친구들은 한국 사람이 아닌 이상 영어로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 언어가 잘 안 통해도 마음은 통한다는 말을 미국 오기 전까지는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다. 영어가 완벽하지 않음에도 진심이 통하고 오랫동안 자주 만나는 좋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미국에서 사귄 친구들은 나와 친하고 싶은 사람이 전부이다.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 경우에만 친구가 되고 내 영어 수준으로 하고 싶은 말만 할 수 있으므로 어찌 보면 너무도 편한 일이다. 미국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땐 나이 많고 적음, 직급 호칭에 상관없이 그냥 이름만 부르며 대화할 수 있고 영어는 존댓말 반말이 전혀 엄격하지 않아 편하다. 영어는 어려운데 영어 대화는 편하다는 사실. 참 신기한 사실이다.
미국 생활은 내게 이미 저질러진 일이며, 엎질러진 물이 되었다. 영어로는 엎질러진 우유. 미국에서 우유는 1갤런(약 3.8리터) 당 0.98~3달러면 살 수 있다. 저렴한 우유를 기준으로 하면 1L를 한화 300원 정도에 살 수 있을 정도로 무척 싸다.
엎질러진 물 Spilled milk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 없듯이, 엎질러진 물을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기왕 엎질러진 물로 그동안 닦지 못하고 미뤄왔던 먼지 쌓인 방바닥을 깨끗하게 닦을 수 있다면 '오히려 잘 됐네!' 생각할 수도 있다. 또한, 비싼 음료가 아닌 '물'을 엎질렀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한국에서 사는 동안 내 나라라서 참 편했지만 반대로 매일 바빴고 피곤했고 이것저것 따지고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아서 복잡했다. 미국에서 살고 있는 지금, 내 나라가 아니라서 너무나도 불편하지만 좀 더 여유롭고 다양한 친구들을 사귀었으며 이것저것 따질 필요가 없어 삶이 단순해졌다. 내 나라는 편하지만 복잡한 삶은 불편하고 남의 나라는 불편하지만 단순한 삶은 편하다.
불편함과 편함은 반대말이라고 생각해 왔다. 다른 나라에서도 살아보니 불편함은 곧 편함이 될 수 있고, 편함은 곧 불편함이 될 수도 있었다. 이 둘은 반대말이 아니라 아마 서로 가까이에 있는 말, 가장 비슷한 말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