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금자리, 그 공간에 담긴 나와 우리의 이야기
내 인생의 찬란한 추억이 담긴 보금자리 역사
나는 태어나고 5세까지는 작은 마을에 살았다. 마당이 있는 작은 단독 주택이었다. 사실 여기서 살았던 기억은 거의 없어서 친정에 남아있는 앨범의 사진들을 보고 나서야 그때의 기억을 조금씩 떠올릴 수 있었다.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니 어린 나는 남동생이 운전(?)해주는 작은 세 발 자전거 뒷자리에 타고 있었고, 그 당시 내가 애정했던 애착인형을 끌어안은 사진도 소중히 담겨있었다.
보금자리에 대한 정확한 기억은 6~7세부터이다.
어린 나이에도 첫 이사여서인지, 주택을 벗어나 첫 아파트여서인지, 그곳에서의 생활이 10여 년 이어지다 보니 그 기억을 잊어버리기 만무하다.
내가 살던 동네는 친정아버지의 안정적인 직장 덕분에 아파트 사택에 살았다.
그곳은 울산과 부산의 경계지점이었던 장안읍 길천리 한빛사택 3단지이다.
봄에는 벚꽃이 만개하고, 봄과 여름사이엔 버찌열매가 주렁주렁 열린다.
가을에는 낙엽이 지며, 겨울에는 앙상한 나뭇가지들만 남아있다.
집 밖으로 나가면 곧장 사계절의 정취를 흠뻑 느꼈던지라(그 당시에는 감사한 줄 몰랐음) 멀리 야외로 나가거나, 여행의 필요성을 그다지 못 느낄 정도였다.
왜 한 번은 벚꽃축제를 기념하여 그 외곽 지역까지 유명했던 가수 분이 초청되어 왔다. 바로 트로트 가수 주현미 님이다. 그분의 노래는 잘 알지는 못했지만, 연예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비롯한 어린 친구들은 물론 남녀노소 상관없이 그분이 타고 있던 차량을 차례도 없이 엉키다시피 열광적으로 따라다녀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사택 근처에는 유치원이 있었다.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명랑한 웃음소리를 내며 모래놀이를 했던 기억도 난다.
무엇보다 사택에는 아이들이 이용할 수 있는 수영장이 있었고, 배드민턴 장과 커다란 운동장을 드리운 축구장도 있었다. 학창 시절에는 그곳에서 50m 달리기를 한 기억도 있다.
그리고 일명 ‘고리동산’이라 불리는 잔디밭이 넓게 펼쳐진다.
유치원 시절과 고등학교 때는 그 ‘고리동산’이라는 곳으로 학교에서 친구들과 소풍을 가기도 하였다.
한빛 사택에서도 우리는 1번의 이사를 할 수 있었다. 20평대에서 30평대로 말이다.
이사 후 311동에 살았을 때는 특히나 사춘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시점이기도 하고, 여러 추억들이 있다.
옆 집에는 같은 학교 친구네가 살고 있었고, 옆 라인에도 같은 학교 절친이 있었다.
그리고, 옆 동에는 어머니들끼리도 현재까지 모임을 하고 계시기도 하고, 정말 나와 인연이 오래된 남사친이 살고 있었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우리 남동생과 어울렸던 남사친. 주말이면 아침잠이 많은 나는 자고 있느라 부스스한데 남동생과 남사친은 우리 집에 쳐(?) 들어오기 일쑤였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를 좋아해 줘서 우리 동네까지 찾아왔던 몇몇 남학생들도 찰나의 순간처럼 잠시 있었다.
그리고, 정말 내가 최고조로 예민하던 사춘기 시절에 사촌오빠가 우리 집에 머무르며, 직장 생활을 할 때가 잠시 있었다.
사촌오빠도 당시에 자리 잡느라 힘들었을 텐데 그 마음도 몰라주고, 그저 같이 생활한다는 자체가 너무 싫었나 보다. 사촌오빠가 다정하게 일상이나 공부에 대한 물음을 해올 때면 정말 까칠하고 차갑게 단답형 정도로만 얘기하고, 그 흔한 눈 맞춤도 하지 않았다. 지금도 사촌오빠와 그 시절 얘기가 나오면 정말 미안했다고 사과하곤 한다.
내가 지내던 311동의 내 방. 그 방이 나만의 첫 공간이었다.
문을 열면 왼쪽에 원목 침대가 자리하고 있었고, 오른쪽 편으로 책상이 있었다. 창가 쪽에는 책장이 있었던 것 같다. 그 공간에서 나는 홀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멀쩡한 책상을 놔두고 항상 침대에서 엎드려 공부를 하거나 일기를 썼다.
그리고 그 당시 유명했던 ‘수학의 정석’을 보고 나면 잠이 오기 일쑤여서 그대로 곯아떨어지기도 하였다. 나에게 수학책은 수면제와도 같은 책이었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번갈아가며 비밀 일기를 쓰는 것이 유행이었던지라 자물쇠가 있는 일기장에 나만의 비밀 이야기(사랑, 우정, 학교생활, 좋아하는 가수 이야기 등)를 차곡차곡 써 내려가기도 했다.
늦은 밤이 되면 습관처럼 정지영 아나운서의 달콤한 음악상자 ‘스위트 뮤직박스’라는 라디오 방송을 틀었다. 2시간 동안 이어지는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 그 속에서 느껴지는 잔잔한 감동과 그에 어울리는 노랫가사와 멜로디.
진행자의 목소리에 온전히 집중하여 방송을 다 듣고 나서야 항상 잠이 들었다.
이 습관은 중2병이 발동했던 나에게 따뜻한 위로이자 쉼이었다.
그 당시에는 부모님께 힘든 점을 말로 표현할 방법도 몰랐고, 맞벌이로 항상 바쁘신 부모님을 보면 내가 짐이 되기는 싫었던 것 같다.
그렇게 여러 추억을 간직한 채 10여 년을 보냈던 사택에서의 생활을 아쉽게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남동생이 배드민턴 국가대표를 목표로 체육 중학교로 전학 후 통학 시간이 길어졌고, 친정아빠의 출근 시간과 남동생의 통학 시간을 최대한 고려한 부산 기장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기장에서의 생활은 내가 결혼하기 전과 후로 나뉜다.
고등학생 때부터 내가 결혼 전까지 기장에서의 첫 집은 아직도 우리 부모님이 살고 계신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힘든 고등학생 시절을 지나오고, 새 출발을 했던 대학을 졸업한 후 여러 자격증을 취득해 내가 목표로 했던, 꿈에도 그리던 직장에 취업까지 이뤄내며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경험하며 굴곡진 인생의 그래프를 그려냈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남편을 만나기도 한 행복한 시절이라 자유롭게 데이트를 하며 늦은 밤 귀가하는 일이 잦기도 했다. 이렇듯 인생의 희로애락을 겪으며, 내 인생의 1막은 막을 내린다.
결혼 후 내 인생의 2막이 열렸다. 남편과의 신혼생활이 시작됐다. 사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첫 아이를 출산했기에 친정엄마께 육아 도움을 받고자 선택했던 곳이 친정엄마와 도보로 7~8분이 걸리는 옆 아파트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아이를 출산하면 행복만 있을 줄로만 알았는데,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가 진짜 시작이었다.
매일 밤이 오는 것이 두려웠다. 수많은 밤들을 ‘오늘 밤은 아이와 어떻게 뜬 눈으로 지새울까?’ ‘밤이 너무 길다’ ‘푹 자고 싶다’를 수없이 외치며, 결국 어린 마음에 친정엄마께 육아의 힘듦을 토로하며 엄마의 보금자리로 가기 일쑤였다.
나중에는 아예 친정살이를 하며 100일 동안 육아, 살림 모든 도움을 받았다. 신랑은 불편했을 텐데 그 당시에는 내가 힘든 게 우선이었다. 신랑은 장모님 댁으로 매일 퇴근하는 게 일상이 되었고, 그렇게 첫 아이에게 나는 모든 게 서툴렀지만, 그만큼 모든 가족들의 돌봄과 사랑을 받으며 잘 자랄 수 있었다.
그리고 29개월 후 둘째가 태어났다. 둘째가 태어난 뒤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친정엄마의 동창 모임과 산행 모임 등 사적 모임이 잦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친정엄마의 도움을 은근히 바라긴 했지만, 대놓고 표현은 못했다.
이미 첫째를 키우며 힘들어하셔서 체중이 10kg 정도가 빠지셨기 때문에 차마 또 부탁드릴 수가 없었다.
‘그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한번 해보자.’
그도 그럴 것이 둘째 아이가 오로지 모유수유만을 고집했기 때문이었다.
첫째를 어린이집 등원차량을 태우려면 차량 시간을 맞춰야만 했고, 하필 그 시간에 둘째가 수유할 시간과 유난히 겹치는 날이 많았다. 그러면 하는 수 없이 둘째 아이를 아기띠로 안아 다짜고짜 제일 큰 옷으로 아이의 머리를 덮어주고는 수유를 할 수밖에 없었고, 내가 끌어 쓸 수 있는 온 힘과 전속력을 다해 뛰어서 첫째의 차량 시간을 결국 맞추게 된다. 어떤 날은 첫째 아이 하원시간을 앞두고 둘째 아이를 수유하면서 잠이 들곤 하여 아이가 집 앞에서 내리지 못해 엉엉 우는 아이를 어린이집으로 데려가야만 하는 날도 종종 있었다.
실은 결혼 전까지 전반적으로 내 인생에 이렇다 할 큰 어려움이나 힘듦을 경험하지 못했었다.
첫째는 정확히 17개월부터 폐렴이 자주 걸렸다. 기관지가 유난히 약한 탓에 5살 때까지는 폐렴으로 입원하기를 셀 수 없이 반복하였고, 이렇게 폐렴이 잦으면 천식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진단도 내려졌다. 당연히 어린이집을 못 가는 날이 허다했다.
그 흔한 어린이집 재롱잔치를 6살이 되어서야 볼 수 있었다.
‘차라리 내가 대신 아파주고 싶은 마음이 이런 거구나’
이제야 생각해 보니 둘째가 태어나며, 내가 두 아이를 홀로 육아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그리고 첫째 아이가 자주 아파서 마음 졸이며 힘든 육아를 경험해 오면서, 조금은 철이 들었던 것도 같다. 엄마의 힘은 어디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건지,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못할 것은 없었다.
우리 부부가 결혼 후 생활했던 신혼집은 아이 둘이 태어나면서 어린이집으로 변모하며, 장난감 살림만큼은 엄청 늘어났다.
23평이었던 널따란 신혼집이 어느 순간 짐들로 가득한, 겉으로 보면 누가 봐도 10평대의 집처럼 생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집에서 내 품에서만 안겨 자랄 것만 같던 두 꼬물이들이 어느새 첫째는 의젓하고 똑똑한 아이로, 둘째는 끼 많은 긍정의 아이콘으로 자라고 있다. 엄마인 내가 해준 거에 비해 너무 잘 자라주고 있는 아이들을 볼 때면 참 고맙다.
결혼 10년 차. 드디어 우리 부부의 힘으로 내 집 장만을 했다.
어느덧 지금의 새 집으로 이사 온 지 정확히 42일 차. 아이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적응을 잘해주고 있다. 벌써 놀이터에서 어울려 노는 친구들이 제법 생겼다.
신랑은 새로운 환경과는 상관없이 언제나처럼 책임감 있게 하던 일을 묵묵히 잘 해내고 있다.
엄마인 나는 이제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신년맞이 새로운 독서모임도 준비 중에 있고, 기타와 서예를 배우면서 그동안 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을 통한 배움의 시간을 계획 중이다.
무기력해지지 말고 활기찬 인생을 위해! 우리의 새 집처럼 따뜻하고 도전적인 나의 인생 3막의 여정을 씩씩하고 멋지게 그려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