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드득뽀드득

by 녹명

그러니까 그 겨울은 춥고 길었다.

겨울 방학이면 옆집 동생에게 빌려온 만화잡지와 군밤, 귤 등 군것질거리를 먹으며 전기장판과 혼연일치가 되어 낄낄대거나 선물로 받아온 빨간색 장화모양의 종합선물세트를 방학 내내 아껴 먹으며 겨울곰처럼 뒹굴거렸지. 눈이 오면 내리막 길에서 썰매 타고 눈사람 만들고 눈싸움하고 그러다 진짜 패싸움도 하고... 눈이 금방 녹지도 않았고 골목길에도 오르막에도 2,3일은 쌓여있었다. 집집마다 대문 밖 담벼락 앞에 콘크리트 쓰레기통, 그 옆에 장렬히 전사한 듯한 창백한 연탄은 힘없이 부서져 마지막까지도 제설제 역할을 했다. 크리스마스이브날 밤 집집마다 대문 앞에서 캐럴을 불러주는 교회 행사를 쫓아다녔지. 허락받고 밤늦게까지 언니 오빠들이랑 나돌아 다닐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 12월엔 유달리 신앙이 불타올랐지. 눈 쌓인 밤은 하얀색 반사판을 둘러 더 아름다웠고 노란색 가로등 불빛에 사방은 보석처럼 빛났다. 버릇처럼 문득 올려본 하늘에 반짝이는 별까지... 흠칫 데인 건가 싶을 만큼 살을 베이는 차가운 공기가 뺨 위를 지날 때쯤 동네 개들의 짓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리면 동화책에 나오는 겨울나라 그 어디쯤인가 싶었다.

그리고 겨울 내내 난 좋아하는 눈을 기다렸지.

YOON,<눈오는 주일 아침-그랜마 모지스 모작>,2024,Oil on panel,33.4cm x24.2 cm


아침에 눈을 뜨면 밤새 눈이 왔을 것 같은 공기의 냄새와 살에 닿는 촉감의 속삭임을 느낄 수 있었지. 기대하며 현관문을 열어보면 실망할 때가 더 많았지만. 내리는 눈을 보고 있자면 내 마음에 찌꺼기가 비워지고 좀 더 착해지고 싶은 마음이 소복소복 쌓이지. 모든 것을 가차 없이 씻겨내려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빗줄기 보다 미움도 더러움도 실수도 가난도 눈물도 잘난 체 않고 공평하게 덮어준다.


그래서 나는 그런 따뜻한 눈이 좋은 거지.

눈이 온다!

뽀드득뽀드득... 새로 산 하얀색 반부츠를 신고

눈 위를 걸어가던 작은 아이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다.

빨갛게 튼 볼과 손등을 호호 불며 아이는 환희 웃어준다.

어서 오라고 환영한다고...

뽀드득뽀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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