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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재 이진주 Jun 13. 2024

나는 촌놈이었다.

공지영의 소설 ”봉순이 언니“를 읽고

공지영의 소설 “봉순이 언니”를 읽고 나서 나는 내 고향이 섬이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았다. 그것도 아주 남쪽 천사의 섬 신안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가 중학교를 가기 위해 뱃길로 세 시간이 넘게 걸리는 목포로 유학을 나와서 영영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도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나는 60년대 출생자로 공지영 작가보다는 세 살 위다.

가장 낮은 계급의 농어업을 하는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가장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도시의 중산층 생활자들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하층의 삶을 살았다.

그래서 “봉순이 언니”는 동시대를 살았던 우리 모두의 언니이고 누이라고 생각한다.

70년대까지도 우리 또래들이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 진학을 못하고 도회지로 나가서 식모로 또는 봉제공장으로 갔던 시대와 맞물려서 “봉순이 언니”는 책을 읽는 내내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이 소설의 주인공 짱이는 그나마 잠시 어려움은 있는 듯하나 그래도 풍요로운 집에서 또래의 아이들보다는 어려움 없이 살아온 아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야말로 그 시대의 최고의 엘리트였고 어머니는 신여성임에 틀림없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지금 세대에 비쳐 보아도 결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70년대는 우리나라가 산업 부흥기로 신분의 계층이 뚜렷해지고 빈부의 격차가 커지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감히 서울에서 태어나 고생을 했다는 사람들이나 어려움을 겪었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체험할 수 없는 다름은 있다. 상상할 수 없는 환경적 다름은 있으나 별반 다를 것 없는 우리 세대의 공통적인 공감하는 내용들이었다.

도시에서 겪은 정치적인 사건들은 지방이나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그 기미조차도 모르고 살았으며 나중에 소문으로 알게 된 일들 이기도 했다.

물론 그 의미심장한 날들의 사건들에서 우리는 생면부지의 타인들일 수밖에 없었음은 그 시대 상황을 반영한 것일 것이다.

그러니까 “따로 똑같이” 한 시대를 살아온 동시대인으로서 이십오 년이 지난 오늘에 이 책을 읽으며 깊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공지영의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동안 잊고 살았던 지난날들이 점철되어 물밀 듯이 가슴을 덮쳐 왔다. 마치 경전을 읽는 것 마냥 책을 읽는 동안 그 심연에서 끓어오르는 아픔을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치 “같은 물을 마셔도 젖소는 우유를 만들고 독사는 독을 만든다.” 는 이야기가 있듯이 각자의 인생에서 정반대의 삶의 질고를 견디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공지영 작가의 자전적 글처럼 느껴지면서 영악한 다섯 살 소녀의 깜찍함을 느께게 된다. 어린 “나”를 통해서 바라본 그 세대의 가슴 아프고 적나라한 처절한 부분도 투영되어 보게 되었다. 오래된 기억 속에서 “나”의 회상이 지금에 와서 또 다른 “나”를 회상하게 됨은 작가의 그것과도 무관하지는 않다.

그 당시 도시의 풍경을 간간히 적어가면서 어린 주인공이 표현하고 느낄 수 없음을 “나”라는 짱이로 옷 입혀 서울의 삶을 단편적으로 표현한 것도 작가의 깊은 감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같이 섬마을에서 태어나 그 나이에 설탕도 몰랐고 또 뽑기도 몰랐고 연탄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다. 우리는 솔잎파리나 솔방울로 땔감으로 사용했고 사카린은 알았어도 설탕이라는 단어도 생소했다. 어쩜 동시대를 살았던 주인공 짱이와는 문화적 생활정도 차이는 시골쥐와 서울쥐 정도였을 것이다.

어느덧 노년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그때를 아십니까?”처럼 다큐를 보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우리의 유년기는 천진난만했고 무척이나 가난했고 배고프고 추웠던 기억밖에는 없는 것 같다.

봉순이 언니의 출생과 그 어린아이의 삶은 생존의 욕구에서 미리 영악해지고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은 이미 “봉순이 언니”를 조숙하게 만들어 버렸다.

봉순이 언니는 그 기본적인 생활마저 상실한 것이다. 집안의 귀금속이 없어져서 도둑 누명을 쓰게 된 것과 어린 나이에 첫사랑을 하고 참혹한 상황에 빠져 버린 봉순이는 가슴 먹먹하게 하는 장면이었다. 봉순이의 인생에서 더 할 수 없는 비극은 원하지 않는 아이의 임신과 낙태, 그리고 나이 많은 남자에게 재취로 들어가고 얼마 못 살고 남편과 사별하고 어린아이는 등에 없고 어디론가 사라져 가버린 봉순이다. 어느 날 전철 안에서 봉순이 같은 냄새 난 아줌마를 본 주인공의 외면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프다. 가슴이 아프다. 눈물이 난다. 그래서 봉순이는 밤새 내 잠을 설치고 말았다. 60~70년대 시골에서 상경한 봉순이 언니는 한 두 명이 아니었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봉순이처럼 풍요로운 집에서 주인공 어머니처럼 작은 동정심이라도 있는 사람을 만나서 의지도 되고 위로도 받았을 것이다. 가족이되 가족이 아닌 한 지붕 아래 식구로 살았던 그 어린 봉순이나 미자 미경이는 많았기에 더욱 밤잠을 설치게 했다.

소설에서는 가족이기주의에 빠져있는 중산층 주부와 사회생활에 올인한 아버지, 그리고 형제들의 무관심은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고 친딸처럼 대한다고 하면서도 친딸이 아니기에 외출할 때는 집을 보라고 남겨두는 것을 보아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 시대를 살았던 우리들은 눈치라는 것을 안다. “눈치 없이”란 말은 요즘에는 별다르게 사용하지 않지만 불과 십수 년 전만 해도 눈치는 그 사람의 처세용이기도 했다.

이글에서는 급변하는 산업화에서 서구적 가치가 보편화되고 그 변화에 적을 하지 못한 토속적 가치도 공존하게 된 시대를 볼 수 있다. 높은 지식을 쌓는 대학은 물론 유학까지 다녀온 주인공은 그야말로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과연 그녀는 동시대를 살아온 또 다른 봉순이들을 모두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녀가 경험적인 차원에서 써 내려간 글은 아주 단편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글에서 특별한 것은 봉순이언니와 주인공은 열다섯 살이나 차이가 나는데 거의 같은 또래의 인식을 주고 있어서 당혹스럽기도 했다.

주인공과 봉순이 언니의 유대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 글은 작가가 어른이 된 삶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또 다른 이질감도 있다. 

80년대 학번으로 본인이 전하고 싶은 내용 중 죄책감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고 시련을 겪었다는 이야기도 나는 공감을 하지만 난해한 생각도 든다. 

사회적 가치의 모순 속에서 다양한 계급이 형성되고 당시 젊은이들의 체험이나 인식은 온전히 세대를 아우를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글의 주인공이 “나”로 표현되었다면 그녀는 낙관적이고 몸소 체험적인 어려움은 없었기에 2인칭 소설처럼 봉순이 언니를 바라만 보며 안타까워했던 조숙한 어린 짱이 일 뿐이라고 감히 생각해 본다.

하지만 공지영 작가는 나와 동시대를 서로 다른 곳에서 살아왔다. 계급이 다른 계층에서 겪어보지 못한 것을 상상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지난날의 추억 같은 기억들을 소환해서 나이 들어 노년에 다시 한번 당 시대의 아픔을 느껴 보게 된다. 책을 놓을 수 없어 단번에 읽어버린 ‘봉순이 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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