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학습하는 습관
나이 들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멋지게 사는 것일까?
나는 먼저 내 생각을 적용할 때 “배움”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배움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몰랐던 것을 알아가는 것이다. 보고, 듣고 가슴에 담으면 마음이 넉넉해지고 삶도 조급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배움이란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동안 익숙했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배움은 태어나서 가족의 울타리에서 시작하여 학교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시작된다.
배움은 어느 시점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통해서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배움이 자기 계발에서 시작된다면 그 과정은 삶의 풍파를 겪으며 간접적으로도 채워가는 것이다. 그래서 배움은 때가 없다고 한다.
논어에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學而時習之 不亦悅乎牙)라고 했으니"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이다.
조 카를로조는 “배움을 멈추지 말라. 날마다 한 가지씩 새로운 것을 배우면 경쟁자의 99%를 극복하게 다.”라고 합니다. 그의 말처럼 평생에 걸쳐 배움은 끝이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배움은 본인이 선택해야 할 문제입니다. 특히 나이가 들어가면서 멋지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풍요로운 정신적인 삶을 위해서라도 관심과 열정을 가져야 한다.
살아오면서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분야의 배움은 정말 어려운 일 일 수 있다.
누구나 헌신과 열정이 없이는 새로운 분야의 배움은 극히 제한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직장을 다니면서, 자기 본업을 하면서 책을 읽고 강의나 강연회에 참석해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습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다행히도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배움은 자신의 가치를 한 단계 높여줄 뿐만 아니라 멋지게 살아가는 지혜의 문을 열어주기도 한다. 꼭 성공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목적이 아니라 배움을 통해서 자아를 실현하고 자기 정체성도 알아갈 수 있다.
우리 세대를 흔히 베이비부머 세대라고 한다. 어린 시절 집이 가난하여 먹을 것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기억에는 초등학교 때는 삼시 세끼를 먹을 수 있는 것은 행운이었다. 춘궁기가 있었고 배고픔에 들로 산으로 헤매며 열매와 새순을 따먹던 기억도 있다. 요즘 아이들이 삐비를 알겠는가?. 유채 쫑다리를 맛있게 먹던 시절, 소나무껍질을 벗겨 하얀 속살을 발라먹던 시절, 그야말로 먹는 것이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다.
배움은 그야말로 사치이기도 했지만 국가에서 문맹퇴치운동으로 초등교육은 의무교육이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사람은 그나마 행운아였다. 나는 몇 명의 친구들과 도시에 유학하는 행운아였다.
배움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매일 학교에 가방에 도시락과 책을 넣어 들고 다녔다. 배움이 우리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절실한 목표를 주는지도 몰랐다. 고등학교를 가고 대학을 나와야 비로소 사회에서 인정받는 가치 있는 삶이 된다는 것도 그땐 몰랐다. 물론 무학이신 부모님이 열정을 가지고 자녀 교육에 적극적이지도 못했다.
가난했기에 학비조차 무리였던 때라 배움보다는 돈 버는 일이 더욱 절절했기 때문이다.
나 또한 학업을 오래 하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히도 직장생활을 하며 정년퇴직 때까지 큰 고난 없이 살아왔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늘 배움에 대한 갈증을 달랠 수가 없었다. 늘 아쉬움 속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책을 읽고 자기 계발을 위한 배움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정규 과정보다는 쉽게 접할 수 있는 서예를 오랜 시간 전념해서 배웠다. 지금은 전라북도 미술협회 서예 초대작가가 되어 심사를 나가기도 하여 보람을 느낀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업무시간 외에 짬짬이 글을 써 왔다. 퇴직을 앞두고 그동안의 결실로 에세이집을 세상에 내어 놓을 수 있었다. 그다음 해에는 회갑기념 시문집을 재차 내어놓았다.
많은 동료와 독자들이 축하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일은 계기로 명실공히 등단작가가 되었고 내 자존감은 한층 고조되어 기쁘고 행복했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지속적으로 배움을 통해 견문을 넓히고 배움을 통해 앎을 글로 써보는 습관을 이어 갈 것이다.
퇴직 이후에는 캘리그래피를 공부하여 서예와 함께 개인초대전을 열어 관심을 끌기도 했다.
배움은 꿈을 이룬다기보다는 내면의 평화와 아름다움을 통해 멋있는 삶을 살고 싶기 때문이다.
배움은 삶의 질을 높여주고 변화를 통해 자기 인생을 멋지게 보여 줄 수 있다.
내겐 아직도 학교에서의 더 많은 배움이 마음 한구석에 아쉬움으로 자리하고 있는 자격지심이 있다.
마음으로 아쉬워하면서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몇 번이나 시도했다가 중단하는 안타까움도 있었다.
퇴직 이후에 생각지도 않게 작가라는 이유로 외국 유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큰 자존감을 가질 수 있었다.
평소 생각하는 것이나 바라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를 더욱 확실하게 인지하는 것이 보람 있게 살아가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배우기를 즐기면 그 무언가의 달인이 될 수 있다.”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이다. “배워서 남 주나.”라는 겪어도 있다. 그만큼 배움은 삶의 소중한 가치이며 자산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배움의 범위는 점점 좁아진다. 어떤 기술을 배워 생활전선에 뛰어들기보다는 마음의 풍요와 감정을 정서적으로 이끄는 내면의 평화를 위함이어야 한다. 특히 문화적 감성을 채워가는 것은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한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작가인 볼테르는 “인간 정신의 온갖 나태함에도 불구하고 문화는 진보한다.”라고 말했다. 문화는 인간의 가치를 드높이고 정신적인 나태함을 벗어나 진보적 힘을 얻는 삶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문화체험은 정서적인 안정감과 인간다운 삶을 일깨워 주는 힘이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좀 더 멋지게 살아간다는 것은 문화생활을 통해 정신적 풍요함과 젊은 감각을 유지하는 비결이기도 하다.
물질적 풍요는 그 한계를 넘어 차고 넘치도록 욕심을 자극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는 지치고 피로함이 더하게 된다. 하지만 정신적인 마음의 풍요는 적당함을 알게 하고 지친 몸과 마음을 따스하게 보듬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질의 풍요는 삶의 편리함을 가져다주고 화려함으로 또 다른 행복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서적으로 빈곤하다면 그 화려함이나 편리함도 무의미할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문화적 감각은 인간의 정서적 함양과 마음의 평화를 채워준다. 나이가 들수록 마음과 몸은 쉽게 지치고 그로 인해 무기력하고 삶에 대한 불안과 허무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자신을 쉬게 하고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는 일에 무관심해진다. 그래놓고 세상을 원망하고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기도 한다.
무엇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도 아니지만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할 수 있다고 마음먹으면 할 수 있는 것이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잠재 능력이다.
어떤 일이라도 시행하지 않으면 결코 승자가 얻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어제는 A교수님의 소개로 생태숲 체험학습에 참여했다. 내게는 전혀 새로운 학습이었다. 배움이라는 것은 이처럼 뜻밖에 다가설 수도 있다. “이것이 무슨 나무인 줄 아세요?” 첫 질문이었다. “이나무는 화살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화살촉 같이 생겨서 화살나무라고 하는데 이곳을 따서 우려먹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숲 이야기는 흥미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보라색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맥문동, 사랑을 이야기하는 상사화, 당신을 위해 겉옷을 벗어주는 배롱나무, 노란 국화를 닮은 죽단화 등등을 소개받았다. 다양한 식물과 나무들을 살펴보면서 새롭게 배워가며 오랜만에 힐링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작은 연못에 수련의 아름다운 자태는 한동안 발길을 멈추게 했다. 이 순간에 남다른 정서적 감성을 통해 몸과 마음의 진정한 평화의 길에서 행복할 수 있었다.
나는 또 요즘에 브런치스토리 작가되기 수업을 하고 있다. 얼마 전에 브런치스토리 작가로 승인받고 글을 올리고 있다. 라이킷해 주시는 독자분들의 응원은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게 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변화에 둔감하고 새로운 일에 뒤처지지 않도록 그에 맞는 배움을 가져야 한다.
언제나 새롭게 보고 즐기는 문화나 참여하는 체험을 통해 배움의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면 좋겠다. 보다 적극적인 주체성을 가지고 배움의 즐거움을 주변에 펼쳐 나가는 것도 멋지게 살아가는 멋진 인생행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