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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재 이진주 Jun 27. 2024

그리운 아버지 감사합니다.

내가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아버지, 가슴 뭉클한 이름에서마저 향기를 잃어버리고 살아왔습니다. 점점 잊혀가는 기억 속에 불러볼 수도 없는 이름이다.

아버지의 생신을 맞이하니 만감이 교차하는 날이다.

2013년 여름이 끝나갈 즈음 어느 날 아침 아버지께서 전화를 하셨다. “지금 군산 병원인데 시간 되면 지금 올 수 있냐?”갑작스러운 전화에 당황했지만 무슨 문제가 생겼구나 직감했다.

“네, 바로 가겠습니다.”하고 군산에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하니 약간 겁먹은 모습으로 대기 의자에 앉아 계셨다.

간호사에게 환자의 보호자가 왔다고 하니 들어오라고 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담당의사는 아무 말 없이 컴퓨터 화면을 열고 영상자료를 펼쳐 보이며 신중하게 예기를 시작했다. 

“전립선이 많이 커졌습니다”

그리고 “상태가 많이 안 좋습니다”어쩜 나이 든 분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라 하며 담담하게 설명했다. 안타깝지만 연세가 있어서 수술을 할 수 없다고 했다. 다만 할 수 있는 처치라고는 남성호르몬 억제술과 약물투여로 진행을 늦춰보겠다고 했다. 

그랬다. 아버지는 전립선암이었다. 전립선이 비대해져서 소변길을 막아서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란 걸 비로소 알았다. 아버지는 그동안 말도 못 하고 혼자 끙끙 앓으며 맘 고생하시면서 소변이 아주 막혀서 힘들면 택시를 타고 혼자서 병원을 찾곤 했다고 한다. “아버지 언제부터 소변이 힘들었어요?”물었더니 벌써 1년이 넘었다는 것이다. 왈칵 눈물이 쏟아지지만 가슴을 누르며 참았다. 

아, 왜, 아들인 나에게 한마디 상의도 안 하시고 이렇게 속수무책일 때까지 혼자 속앓이를 하셨을까? 속상하고 안타까운 마음은 무너지는 아버지의 자리를 온 맘으로 안아야 했다.

이때부터 아버지의 병원 생활은 시작되었고 남자로서의 자존감과 아버지의 권위는 빛이 바라기 시작했다. 

아랫배를 뚫고 방광에 요로호스를 꽂고는 “소변이 편해서 좋다”하시던 모습에서 같은 남자로서 비애를 느꼈다. 

상태는 조금씩 나빠지는 것 같았다. 고관절에 까지 전이가 되어 치료에 희망을 둘 수가 없게 되었다. 이렇게 견디다 생을 마감해야 한다는 의사의 진단이 옳았는지는 모르겠다. 좀 더 일찍 증상을 함께 공유했더라면 조금이나마 시간을 벌 수 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 속에 여러 가지 시술법과 약물치료를 병행하며 병의 진행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보려고 담당의사와 상의를 했으나 자기의 경험치로는 비관적인 판단을 하였고 나를 설득하였다. 그리고 당신이 최선을 다 해보겠다고 했다. 결국 그 병원에 입원하셔서 치료를 하면서 생을 연장하게 되었다. 가끔씩 집에 가시고 싶다고 하시면 걷기도 힘드시고 거추장스러운 링거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휠체어를 이용해 병원 앞 산책만 시켜 드렸던 것이 못내 아쉽고 속상하기마저 한다. 그 이후로 집에 가시지 못했다.

방광에 부유물이 쌓이고 출혈마저 생겨서 방광에 꽂았던 호스가 막히는 일이 종종 생기면서 그 고통과 자존감의 상실을 아버지는 말없이 과정들을 견뎌내셨다. 시간을 내서 아버지를 보러 갈 때마다 안타까움은 점점 더 커져갔다. 입맛이 없어 다른 음식을 못 드시고 팥죽이 드시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는 한동안이나 팥죽만을 그나마 드셨다. 그러던 중 나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일이 생겼다. 가을은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과일가게 앞을 지나다가 빨갛게 익은 홍시감을 보니 아버지께 드리고 싶었다. 몇 개 사서 아버지 드시라고 드렸다. 그때 홍시감 씨가 씹히어 앞니가 부러져 버린 것이다. 예전에 앞니를 틀니로 해서 끼웠는데 오래 닳아서 겨우 조금 붙어 있다가 홍시감을 드시면서 씨를 물으셨나 본다. 앞니가 떨어져 버린 아버지는 무덤덤하게 “이가 부러졌네 “하시며 뱉어 나에게 주시며 개의치 않으셨다. 병환이 짙은 모습에 앞니마저 없으니 더욱 약해 보이시고 측은해 보였다. 나는 큰 죄를 지었고 마냥 가슴이 아팠다. 지금 상황에서 이를 할 수도 없고 저런 모습으로 보내 드려야 하는지.. 

그해 첫눈이 내리려고 하는 날 새벽에 아버지는 외롭게 쓸쓸하게 통증을 털어버리시고 작별인사도 없이 떠나가셨다. 11월 6일 새벽 2시경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임종을 알리는 전화였다. 전날 저녁때 특별한 징후가 없어서 잘 주무시라고 하고 집에 왔는데 가시는 모습도 보지 못하고 작별 인사도 없이 그렇게 아버지는 가셨다. 

82세의 나이로 당신의 다섯 형제의 뒤를 이었다. 벌써 10년이 지났다. 여름이면 아버지와 함께 고향 섬에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벌초하러 다녔었는데.. 

여름이 왔다. 올해도 아버지는 안계시만 동생들과 벌초하러 갈 예정이다. 아마도 아버지는 우리를 따라 같이 가실 것이다.

그렇게 좋아하시던 고향에 이제는 자유롭게 가실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에게는 외손자가 5명이나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아버지의 생신이 다가오고 있어서 인지 아버지가 그립다. 평소 별말씀이 없으셨지만 정이 많으시고 우리에겐 화도 잘 안 내시는 아버지, 평생 순탄하지 못한 인생을 가난 속에서 분투하시며 겨우겨우 사시면서 자식들에게 늘 미안해하시던 아버지, 더 줄게 없어서 담배 한 모금 깊이 들이마시고 내뿜으시며 하늘만 보시고 한숨 깊이 들이마시던 아버지다. 아버지는 농부시며 농번기 틈틈이 바닷일도 하시는 어부셨다. 소에 쟁기를 얹어 밭갈이를 하실 때는 가끔씩 나에게 쟁기 성애를 누르라며 밭갈이하던 때도 생각난다. 모내기를 할 때는 못줄을 잡으라 하시고 어른들이 모를 쪄 내면 이리저리 끌어다 모내기하기 좋게 뒷일을 했던 추억, 새참이 나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던 쌀밥맛이 지금도 아련하기만 하다. 겨울을 보내고 처음으로 흰쌀밥에 맛있는 반찬이 나오는 때이기 때문이다. 건너섬 개울가에서 망둥어 낚시를 가르쳐 주시고 바닷물이 들어오면 납작한 조약돌 골라 물수제비 뜨시며 사랑을 전해 주셨던 아버지와의 어린 시절 추억은 아련함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요즘 아이들은 전혀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던 우리들의 어린 시절에 아버지와의 추억들이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비가 많이 와서 아버지 등에 업혀 학교에 갔던 기억과 간혹 횃불로 낙지를 잡으러 갈 때 갯벌에 따라 나갔을 때와 목포에서 중학교 유학을 나왔을 때 자취방에서 아버지 곁에서 팔배게를 하고 잠이 들었던 기억 몇 가지가 생각난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은 신안군 작은 섬마을에서 9남매의 둘째로 태어나 큰형이 6.25 참전 중 전사하시어 사실 맏아들로서 부모를 모시고 형제를 돌보는 위치에 있었다. 일찍 세상을 떠나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대신해서 가업을 이루고 연안어업을 중심으로 농업에 종사하셨다. 아버지께서도 5남매를 두셨으나 결핵으로 딸 하나를 보내고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고향을 떠나 온갖 고생을 하시게 되었다. 조개잡이를 하려고 군산에 오셔서 일하시다가 가까운 친구에게 빚보증을 서주시고 잘못되어 전 재산인 배를 빼앗기고 극한의 배신감에 큰 고통을 견디며 살다가 두 번째 딸도 병으로 잃게 되었다. 가난 때문이라고 운이 없다고 한 번도 탓하지 않고 처지를 비관하시면서도 내색하지 않으셨다. 어떻든 지금까지 가정을 지켜 주신 아버지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장성하여 존재하고 있음에 감사를 드린다.

우리 아버지는 글씨를 아주 잘 쓰셨다. 늘 메모하고 공부하셨다. 지금은 몇 권의 노트에 흔적만 남겨 놓고 가셨다. 

아, 그리운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나를 낳아 기르시면서 어렸을 때 소아풍이 생겨 다 죽어가는 나를 업고 큰 섬으로 갯벌을 건너 달리셨다던 어머니, 그 옆에서 아들을 살리겠다고 발 동동 구르셨던 아버지, 큰 마을 침술사를 찾아 침을 맞혀 겨우 고비를 넘기고 이렇게 건강하게 자라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 손주를 보았으니 당신이 더욱 그립습니다. 

남다르게 유난히도 친척들을 좋아하시고 형제를 사랑하셨던 아버지 당신은 가난 속에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따뜻한 마음의 쉼터가 되어주셔서 고맙고 감사합니다.     

벌써 여름날씨가 되어버린 신록의 계절 6월을 살아가고 있다. 6월은 아버지의 생일이 있는 달이라 그런지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났다. 오늘따라 아버지가 그립다. 책장에서 오래전 출간된 김정현의 <아버지>란 책을 다시 펴보게 된다. 

세상에는 많은 아버지들이 있다. 아버지라는 이름 아래 존재만으로도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자기 아이들에게만은 특별한 사랑과 애틋함을 가슴에 담고 살아간다. 나이 들고 병들면 먼 산만 바라보고 푸념 한마디 없으신 아버지들을 생각해 본다. 나 또한 아버지로서 내 아이들을 바라볼 때 우리 아버지를 닮았다 생각하게 된다. 아이들만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가는 요즘에 생긴 기러기아빠, 갈매기아빠, 독수리아빠라는 신조거가 있다. 그나마 독수리 아빠였으면 좋겠는데 추운 방에서 덜덜 떨며 아이들 소식만 기다리는 펭귄아빠는 서글픈 존재로 남아있을 뿐이다. 

이쯤 해서 내가 아는 친구의 아버지 예기를 소개하려 한다. 

아버지는 내 아버지 일뿐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자기 아버지를 자식 된 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존경받는 아버지와 숨기고 싶은 아버지가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 이유 없이 존경받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친구의 아버지는 참 보잘것없고 내세울 것 없는 수위출신 아버지였다. 

평생을 성실한 수위로 살아오셨고, 정년 후 일당 2만 원짜리 잡부일을 하시는 

출판사 사장을 아들로 두신 아버지였다.

이가 상해 임플란트를 권유하는 아들에게 임플란트의 가격을 듣고는 불편함을 참고 평생을 살아오신,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선뜻 이빨도 못하는 아버지이지만, 그런 아버지의 정신적인 유산이 그의 아들을 똑바로 키워내셨다.

우리나라 대통령보다 훨씬 훌륭한 아버지!

시골 정미소를 한 갑부, 12명의 자식(배다른)을 둔 아버지의 유언은 무엇일까?

12명의 자식들은 아버지가 유산 분배를 어떻게 할까? 

아버지의 입만 보고 있었지만,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다른 말없이

 “오는 손님들 잘 먹이고 대접 잘해서 보내라!"

섬김과 존중을 가르쳐준 아버지의 자식들 12명이었지만 

재산싸움 없이 다 잘 되었다고 했다.     


오늘은 가수 주현미의 노래 <아버지>의 가사가 더욱 당신을 그립게 한다.

그때는 왜 안보였을까 그대의 무거운 발걸음

차디찬 빈 잔을 뜨거운 눈물로 채우신 아버지

그때는 나 왜 몰랐을까 그때는 왜 외면했을까....

당신의 그 깊은 사랑을 이제야 알아갑니다

무거운 그 발걸음에 숨겨진 그 마음 몰라봤네요

아 당신이 떠난 후에야 그 마음을 알아봅니다

못난 맘에 외면했던 그 사랑 이젠 내가 드릴게요. 아버지     

오늘날 아버지에서 할아버지로 전환되는 베이비부머시대에 태어난 아버지들은 더욱 안쓰럽고 측은하기도 하다.

나의 아버지, 당신이 계셨기에 내가 살아있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아갈 수 있어서 감사의 이유이고 오래토록 내 마음에 감시르르 물결치며 함께할 것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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