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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재 이진주 Jun 05. 2024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꿈꾸며....

막무가내씨와 내 맘대로 씨

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무슨 일이 어떻게 얼마나 일어나는 줄 모른다.

너와 나는 좀처럼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 없다.

나는 너를 막무가내(莫無可奈)라고 부른다.

오늘도 하루 일과를 무탈하게 마치고 차를 운전하여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좌회전 신호를 받아야 하기에 좌회전 차선에 서려고 하는데 길게 늘어선 차량으로 인해 나는 차선 안에서 약간 비스듬히 차를 멈추었다. 쉴 새 없이 변하는 교통상황에 대처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다.

그때 어떤 막무가내씨가 자기가 가야 하는 길에 방해가 된다는 듯 창문을 열고 알아들을 수 없는 입 모양으로 욕을 하는 듯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차량에게 방해가 조금도 되지 않았는데 그 막무가내씨는 자기 가는 길에 넉넉하게 비켜주지 않았다는 듯 불만을 표하고 갔다. 내가 그 소리를 듣지 못해서 덜 화가 났지만 참았다. 요즘 흔히 보는 막무가내였다. 만약에 그에게 내가 어떠한 반응 했다면 뭔 해코지를 할지 모르기에 잘했다 싶기도 했다.

“내가 가는 길에 방해가 되지 마라. 나는 내 길을 가련다.”-막무가내의 말이다.

세상살이가 참 쉽지 않다. 조심조심 살아도 결코 만만치 않은 삶이다.

요즘처럼 모든것이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태에서는 자기생각대로 사는것이 소신있고 줏대있는 당당한 삶이라고 할것이다.

아침 출근길에 어떤 아주머니는 리어카에 박스를 가득 올리고 위험하게 차선을 역주행하여 걸어오고 있었다. 2차선 도로에서 한 차선을 역주행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이 아주머니도 막무가내다.


요즘 사람들의 살아가는 수준은 기본질서준수 의식은 벌써 사라진 지 오래다. 단속카메라가 없는 도로에서는 속도와 신호를 무시하는 운전자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깜박이는 켜지 않는 게 상식이 되어버렸다. 무엇이 저리도 급해서 사고의 위험을 나 몰라라 하고 내 달리는 것일까?

특히나 배달의 신들께서는 막무가내의 형뻘인 내 맘대로다. 내 맘대로 달리다 보니 사고의 위험을 부추기고 원활한 교통의 방해도 일쑤이다.

어쩔 때는 나는 겁이 난다.

차선을 오락가락 갈지자로 일명 칼치기를 하는 부류는 도대체 어떤 이들일까? 언제부터인지 막무가내씨내 맘대로 씨가 늘어나고 있는 듯하다.

요즘 복잡한 차도를 아무 생각 없이 무단 횡단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나이 드신 노인분들이 위험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언가에 홀린 듯이 차도를 거꾸로 걸어가거나 주변을 살피지도 않고 신호도 무시한 채 횡단하기도 한다.  요즘 노인들의 교통사고율이 30%에 육박한다고 한다.

어떤 이는 노인유모차를 끌고 차도로 다닌다. 바로 옆에 깔끔한 인도가 있음에도 왜 저러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분들도 막무가내나 내 맘대로의 일가친척일 것이다.

이와 비슷한 수많은 사례를 담은 이야기가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의 삶에서 과연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른다.

우리 아파트에는 매일 주차위반 딱지를 덕지덕지 붙이고도 그대로 다니는 차가 한대 있다. “붙이려면 붙여라. 나는 계속 여기에 주차를 할 것이다.” 이 사람도 아마도 막무가내씨 일 것으로 추정된다.

혹여 간섭이나 듣기 싫은 무슨 말을 했을 때는 욕은 물론 무슨 해코지를 감당을 할 수가 없다.

그냥 모른 체하고 “막무가내님이 지나가시네. 내 맘대로 님이 저기 계시네.”하면 될 테니까 말이다.     

나는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에 관심이 많다. 서로 돕고 배려하며 같이 잘 사는 상생하는 사회의 실현을 바라고 있다.

나만이라도 기본 질서 지키기에 솔선수범하고 서로에게 작은 힘이라도 되어줄 수 있기를 늘 마음에 담고 살아가고 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이기주의적 발상을 내어버리고 “네가 먼저 해라.”는 양보의 가치를 지켜가고 싶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쩜 “양동이 속의 게 증후군”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와 관련 김인호시인의 시 <참게이야기>에서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항아리 속에 참게 한 마리를 넣어두면 금세 기어올라 도망쳐 버리지만 두 마리 이상을 넣어두면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잘하고 있는 사람을 응원하고 도와주기는커녕 그의 진로를 방해하게 되고 결국 자신도 잘 될 수 없다는 우화 같은 이야기를 흘려버려선 안된다.

공동체 안에는 다양한 성정을 가지고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때론 연약한 사람에게 지팡이를 들려줄 수 있는 배려와 존중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간혹 우리가 억울해하고 괴로움에 있을 때 반드시 그 원인을 제공한 상대가 있다.

자기는 잘 못하면서 잘하는 척 남의 뒷다리나 잡는 방해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소외되고 존재감 없는 실패한 인생들이 많이 있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잘못된 의식이 이미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다.

우리가 살아가는 작은 공간에서부터 공동체 의식을 심어 가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1970년대 산업화를 겪으면서 빠른 변화와 개혁을 해 왔다. 나태할 수 없는 땀과 희생을 겪으면서 일궈낸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너무나 풍요롭고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다.

우리는 너나 나나 모두 잘 살기를 원합니다.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서 잘 먹고 여유롭게 잘살고 싶은 것이다. 이제는 이런 기대치를 충족한다는 것은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가능하기도 해졌다. 세계여행을 하다 보면 우리나라처럼 좋은 집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사는 나라는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국민들의 질서의식도 그에 비례하여 좋아졌습니까? 선진국형 마인드를 가졌습니까?

아직도 개인은 행복하지 않아 보인다.

아직 멀고 먼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서두에 이야기했던 막무가내씨와 내 맘대로씨들이 늘어나고 있는 사회적 병폐가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불안해지기도 다.  우리는 일반시민이기에 시민으로서의 삶의 영역에서 최소한의 도덕적 가치와 윤리의식을 가지고 사회질서 지키기에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현장에서 기득권층의 막무가내내맘대로, 내로남불의 행태가 줄어들기를 바라며 섬기는 권리와 존중하는 의무를 다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실현을 위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합니다. 먼저 상위계층에 있는 사람들이 솔선수범할 때 사회는 조금씩 나아질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도덕과 윤리를 겸비한 사회 지도층으로부터 내로남불의 무뢰한들이 출현하게 되므로 그것을 보고 못된 행태를 답습하는 시민들이 생겨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항상 좋은 일에 “네가 먼저.”라는 양보와 배려, 지식과 기득권을 앞세우지 않는 겸손과 섬김을 나는 이야기 하고 싶다.

내 맘대로씨도 막무가내씨도 소중한 우리 사회의 일원이다. 함께 나누며 살아가야 할 공동체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이질감이 없는 우리 사회의 아름다운 공동체를 희망해 보면서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를 실천하며 기본에 충실한 삶을 살기를 소망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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