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선의 백성이다
"사람이 하늘이니 모두가 평등하다는 말에 가슴이 뛰었다고 했다. "
월요일 아침이다. 봄이 꽃들을 앞다투어 피워놓고 들판으로 달린다. 논두렁마다 둑새풀이 파랗게 물이 올랐다. 더불어 겨우내 찬설을 견뎌내더니 보리순도 힘을 받아 일어섰다. 노란 산수유 꽃이 피더니 갑자기 폭설이 내려 봄이 오는 것을 시샘하는 듯했다. 그러더니 금세 날씨가 따뜻해져서 하얀 목련이 피고 개나리도 진달래도 활짝 피었다. 봄이면 양지쪽에 제일 먼저 피는 조그마한 개불알풀꽃이 유채꽃아래로 만발했다. 시절이 하 수상하니 날씨마저도 뒤죽박죽 질서 없이 어수선하기만 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모악산 능선에 올라선 아침해를 정면으로 맞으며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이 있는 정읍시 덕천면으로 향했다. 출근 시간대라 차들이 많이 지체되고 있다. 서둘지 않고 차분한 마음으로 1번 국도를 따라 달려 한적한 농로 옆 언덕에 노란 개나리꽃 무리를 지나고 있다.
나는 동학농민혁명 전문해설사 양성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오래전 학생이었던 때 교과서에서 잠깐 배웠던 역사 이야기였다. 새삼스럽게 왜 동학혁명에 대해 다시 배우고 있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망설여지기도 했다. 다만 어느 지인으로부터 전문해설사 양성교육생을 모집한다는 정보를 전해 듣고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특히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시작되었기에 동학농민혁명 관련 사적지들을 어렵지 않게 접하는 기회가 많았다.
정읍에 처음 발령을 받아 갔을 때 나는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조직에서 밀려났다는 고통 같은 것을 느꼈었다. 항상 선도적 위치에서 주축이 되어 살아왔는데 어느 날 변방 같은 먼 거리로 발령이 나서 왜곡된 나의 평가에 마음이 무거웠었다. 조직에서 외면당했다는 소외감을 느끼면서 달랠길을 찾아보다가 우연히 들른 곳이 지금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이었다. 기념관에 들어서자 나를 단번에 압도해 버린 녹두장군 전봉준의 초상화 눈빛에서 나의 연약함은 순식간에 녹아 버렸다. 전봉준과 김개남의 눈빛은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기개가 충천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용기를 얻었고 어떠한 시련과 차별이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명예를 다시 찾고 당당하게 우뚝 서고 싶었다.
정읍지역에는 동학농민혁명의 발원지로 곳곳에 사적지들이 관리되고 있었다. 전봉준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고 사발통문이 발견된 곳과 모의장소가 지정되어 있다. 예전에는 고부군이 큰 고을이었고 곡창지대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부임한 조병갑은 탐관오리가 되어 농민과 천민 노비들에게 가렴주구를 하여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게 했었다고 한다. 조병갑의 탐욕스러운 폭정이 원인이 되어 농민의 궐기가 발발하게 되었다고 했다. 조병갑은 동진강 지류에 만석보를 설치하여 수세를 받는 등 온갖 폭정을 일삼다가 결국은 분개한 농민들을 말목장터에 모이게 하였다. 농민들이나 노비들은 개만도 못한 놈이라는 말도 비참하지만 가장 참기 힘든 것은 자기 아들과 손자도 이런 멸시와 혐오로 뒤범벅된 사람들의 눈빛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하늘이 무너지는 좌절감을 피할 수 없었다. 사람 대우를 받으며 대대로 신분차별의 늪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목숨까지 바치려는 각오가 충만했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나의 자식과 손자는 저와 같은 고통을 겪지 않는 세상”을 꿈꾸게 되었다고 한다.
그동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 깊이 고찰하지는 않았었다.
동학농민혁명은 19세기말 개항의 여파로 외세의 침략과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농민이 주축이 되어 시작된 운동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평등세상을 꿈꾸며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일어선 민족항쟁이었다.
동학은 천도교라 불렸으며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내천 사상으로 고대 중국의 유교와 불교와 도교를 아우르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를 표방하고 수운 최제우가 창도한 창시자였다.
19세기말 동학은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와 조선의 혼란한 정세와 기득권층의 부패되어 몰락해 가는 시점이어서 동학은 빠르게 확장되어 갔다.
1894년 동학을 기반으로 하는 고부농민봉기는 무장에서 포고문을 공포한 후 고부관아를 점령하고 백산을 거쳐 정읍황토현과 장성황룡강 전투에서 관군에게 승리를 거두고 전라도 수부 전주성을 무혈입성하게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은 함경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전국적으로 산발적으로 일어났으나 결국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상황이 달라지며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군은 전주화약을 맺고 철병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화약은 지켜지지 않았고 일본과 청나라의 전쟁을 겪게 되며 전국적으로 2차 봉기를 단행했으나 일본군의 현대식 무기에 농민군들은 무기력하게 쓰러져 갔다.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대패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구국애민의 표상인 동학농민혁명은 미완의 혁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이라는 동학의 기치를 걸고 척왜척양운동으로 이어지며 자유와 평등을 추구한 동학농민혁명은 안타깝게도 한지역의 반란사건으로 치부되어 역사의 뒤안길에 버려졌다.
동학농민 혁명은 신분제도를 철폐하고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외세의 침입을 몰아내고 사람답게 살기를 원하는 백성들의 피를 토하며 죽기를 마다하지 않은 항쟁이기도 했다. 오늘날 다시 돌아보는 동학농민혁명은 역사적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볼 때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네 삶에 큰 교훈으로 삼게 되었다. 세상이 변하고 개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신분차별은 또 다른 형태로 변하여 여전히 민중 가운데 현재도 존재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살고 있지만 사대주의 사고의 잔재는 뼛속으로 배어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본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이미 실현 불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역사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를 맞이하고 흘러가고 있으나 아직도 지배권력의 역할과 경제력의 양극화는 적잖은 논제를 파생하고 있다.
131년 전 동학농민혁명은 전국적인 농민항쟁으로 그 당시의 시대적 이데올로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짧은 시간에 세기말의 둔턱을 피를 흘리며 넘어야 했다.
몰락한 양반층이 늘어나며 근대화로 나아가는 시대적 욕구 앞에서 힘겨운 대가를 치러야 했다. 관리들의 수탈과 무자비한 탄압은 결국 죽음 앞에서 새 세상을 꿈꾸는 혁명에 목숨을 던졌던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의 맨 앞에서 농민군을 이끌었던 녹두장군 전봉준의 눈빛에서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엄중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공주 우금치전투에서의 패배는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이라는 걸출하고 강인한 지도자들도 결국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조선왕조 지배계층에는 엄청난 충격으로 인식되었다. 이들은 자국의 문제를 외세에 의존하는 실정을 당연시하는 어리석음을 보여주었다.
불량한 토호세력과 몰락한 양반의 무리들을 징벌하고 만인이 평등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고자 했던 동학농민의 궐기는 새로운 세상을 앞당기는 선도적 역할을 감당했다고 자위적인 평가를 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또 다른 갈등 양상이 생기고 점점 폭력적으로 발전해 나갔다.
동학 농민혁명은 항일 민족 자주투쟁이었고 한국 근대화와 민주주의의 출발점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은 우리 시대의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의 발전과 정치, 사회, 경제적 측면에서 자주화를 위한 과제로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오후에는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고부에 사적으로 남아있는 사발통문의 발견터와 무명의 농민군들의 위령탑을 둘러보았다. 사발통문이 발견되었다는 동학농민혁명 모의장소를 둘러보며 해설사의 분개하는 목청으로 떨리는 순간을 보여주어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로 숙연해지기도 했다. 벽화로 소개되는 “녹두꽃은 영원하리”라는 글과 그림은 그 당시를 회상해 보게 했다.
고부 대뫼마을에는 동학농민혁명 모의탑이 있고 사발통문 작성 터라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었다.
버스를 타고 또 다른 터에 도착하니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세웠다는 갑오동학혁명 기념탑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5.16 군사혁명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아직도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는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전쟁”“갑오농민전쟁”“고부민란 동학난”등으로 인식을 달리하고 있음도 정리되어야 할 역사적 사명이 남아있다.
이제는 5월 11일을 동학농민혁명 기념일로 지정이 되었고 유네스코 서계기록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고 한다.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전북특별자치도의 조례로도 남게 되어 역사적 팩트에 의한 근거를 마련했으니 다행으로 생각한다. 전라도 고부 군에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짧은 기간에 역사적 사료를 남기고 근대화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가치도 담아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