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가다
1894년 그해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피맺힌 절규를 하며 흰 무명띠를 이마에 두르고 서러움에 복받쳐 울던 농민들의 함성이 들리는 듯한데....
차별 없이 자라는 빈 논에 둑새풀처럼 꽃은 피우지 못하지만 다 같은 봄을 맞이하고 싶었을 것이다.
<동학 꽃>
동백의 붉은빛은 민중의 핏빛이다.
탐학과 가렴주구 말목장터 봉기했네
꿈꾸던 평등한 세상 못 피우고 졌구나
황토현 전적지에 부상자의 신음소리가 바람결에 들리는 듯했다.
자주광대풀이 여전히 피어나고 노란 유채꽃이 수천 개의 횃불처럼 들판을 밝히고 있다.
나는 왜 이 자리에서 131년 전 붉은 피 흘리며 쓰러져간 영혼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을까?
풀빛의 힘으로 일어섰던 민초들의 탐학과 가렴주구를 원망하며 주린배를 움켜쥐고 떨리는 가슴으로 죽창에 피를 묻혔을까....
고부군수 조병갑을 모를 리가 없건마는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막다른 골목 넘을 수 없는 절벽 앞에서 좌절하며 펄떡이는 가슴을 서로서로 부둥켜안고 깃발아래 선채로 주검이 되었을 것인가....
그들은 “사람이 하늘이니 모두가 평등하다”는 말에 가슴이 뛰었다고 했다.
부와 권력의 대물림인 신분제도에서 벗어나 어서 빨리 평등한 세상을 보고 싶어 했다.
개만도 못한 놈이라는 말도 비참하지만 가장 참기 힘든 것은 내 아들과 손자도 이런 멸시와 혐오로 뒤범벅된 양반들의 눈빛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역사는 오늘도 도도히 흐르고 있다. 어쩌면 승자의 몫이라는 역사인식이 사실을 왜곡하고 있지는 않은지...
선택과 해석의 기준은 현재라며 “역사는 고르는 것이다”라고 하는데...
우리가 잊고 있었던 동학농민혁명을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2025년 봄 어느 날 나에게 들꽃이 피듯이 소리 없이 다가온 동학농민혁명 전문해설사 1기 모집공고가 다가왔다. 다른 생각을 해 볼 틈도 없이 선뜻 신청서류를 작성하고 제출서류를 첨부하여 접수를 하였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분간할 수는 없었지만 양성교육생으로 선발이 되어 50시간에 걸친 프로그램 일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25명이 선발되어 빡빡한 일정을 알차게 소화하면서 오늘도 봄볕에 타는 줄도 모르고 헉헉대며 숨찬 비탈길을 올라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역사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고 했듯이 당시의 농민들의 생활실상이나 사회상 등 다방면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면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관점에서 접근해 보도록 했다.
1876년 외국의 요구로 개항을 하게 되고 서양과 일본의 문물이 들어오고 우리 쌀을 주로 수출하게 되면서 농민들과 소상인들은 많은 혼란을 겪게 된다.
조선후기의 우리나라는 양반과 노비의 신분적 차별과 이로 인한 지배층의 수탈과 부정부패가 심화되었다. 중앙정부의 역할이 줄어들고 지역토호들이나 거상들이 나라가 행해야 할 치안과 행정마저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점점 몰락해 가는 양반지배계층의 탐학과 무질서는 결국 농민들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겨주게 되었다.
1860년 수운 최제우는 시천주의 교리를 중심으로 이러한 사회상을 반영한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인내천 사상으로 서학에 반하는 동학을 창도하였다. 변혁을 꿈꾸는 농촌 지식인들이 빠른 속도로 동학에 입도하게 되었으며 빠른 속도로 번져 나갔다.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의 탐학과 농민 착취는 극에 달하였다고 전해진다. 하루하루 모질고 질긴 목숨 건사하다 결국 죽기를 각오하는 봉기에 죽창을 들어 올렸다.
1894년 1월 10일 전봉준과 고부농민들은 두들겨 맞아 죽은 가족의 시체를 끌어안고 견딜 수 없는 분노로 말목장터에 모여들어 봉기하여 고부관아를 점령하고 만석보를 혁파하였다고 했다. 말로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고 떨리는 몸서리를 느껴질 것 같았다.
고부 농민군이 백산으로 달리며 다른 지역 농민들에게도 봉기를 촉구하였다고 한다.
정부는 안핵사 이용태를 보내어 무고한 농민들을 동학교도로 학살하고 재산을 약탈하여 농민들의 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고 한다.
동진강을 따라 촉촉하게 흘러가는 물길에 부안 백산성이 아직 남아있어 그곳에 올라 보았다. 김제평야와 고부평야가 내려다 보이는 최고의 요새인 듯했다. 이곳은 백제의 왕자가 나당연합군을 대항하여 구원군을 맞이한 역사적인 곳이기도 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언덕 위에 오르니 깃발은 혼이 들린 듯 나부끼고 “동학혁명백산창의비"라고 새겨진 돌탑은 당시의 숭고한 영혼들을 위로라도 하는 듯 처연하게 서 있었다. 여기에 당시를 소개하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앉으면 죽산(竹山)이요, 일어서면 백산(白山)이라. “ 이 말은 농민군이 앉으면 죽창만 보이니 죽산이요, 일어서면 하얀 옷이 보이니 백산이라 했다고 해설사께서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 ”부안백산은 동학농민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역사의 현장이다. “라고 소개하고 있다.
동학 농민군은 지금의 고창 무장에서 손화중과 전봉준과 김개남이 척양척왜(斥洋斥倭), 광제창생(廣濟蒼生),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을 기치로 내걸고 기포하여 부안 백산에서 고부농민군과 합세하였다고 한다.
농민군은 창생을 도탄에서 구하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고자 함이며 안으로는 탐학하는 관리를 처단하고 밖으로는 강폭 한 도적의 무리를 쫓아내고자 함이라고 했다. 더 이상 양반과 부호의 앞에서 고통받는 민중과 굴욕을 당하는 아전들의 원한을 갚고자 했다고 한다.
또한 조선 정부는 농민군을 토벌하고자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고 장위병을 보냈으며 전라감사도 감영군을 동원하여 농민군을 진압에 나섰다.
농민군은 4월 23일 장성 황룡촌에서 경군과 싸워 크게 이기며 여세를 모아 4월 27일 호남의 중심 전주성을 점령하였다고 한다.
전주성에 무혈 입성하였으나 잦은 접전도 있어서 많은 희생자를 남겼다고 한다. 오늘은 그 역사적 현장에 들어섰다. 전북도청이 이전하고 그 자리에 전라감영이 새로 복원되고 있는 현장에서 전주화약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전봉준과 홍계훈 사이에 몇 차례 문서가 오간 뒤에 5월 7일 농민군이 요구하는 폐정계획안을 정부에 요구하고 농민군의 신분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합의를 이루고 5월 8일 전주성에서 철수하였다고 한다.
농민군이 요구했던 폐정계획안의 주요 내용으로는
-탐관오리, 양반, 토호들의 탄압과 경제적 수탈을 금지할 것.
-노비제도를 폐지하고 신분상의 차별대우를 없앨 것.
-무명잡세를 폐지하고 고리대를 무효화할 것.
-친일분자를 처벌하고 미곡의 일본 유출을 금지할 것이었다.
정부는 김학진을 전라감사로 임명하고 농민군을 회유하는 한편 청에 출병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안타까운 사실은 결국 전주화약은 지켜지지 않았고 철수한 농민들은 정부군에 의해서 토벌하게 되면서 지도부는 또다시 농민들의 기포요구를 수용하면서 2차 봉기로 이어졌다고 한다.
동학농민혁명은 1년간에 걸쳐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정부군과 대치하며 청일전쟁의 소용돌이에서 결국 실패로 끝난 농민 봉기였으며 근대사에 남는 역사적 사회변혁운동의 시발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894년 농민전쟁은 농민들이 요구한 생존권과 평등세상에 대한 염원은 패배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만석보에서 다시 듣네 <제2회 황토현 시문학상 공모전 입상작>
막불겅이 신문지에 돌돌 말아
울화로 허둥대는 가슴을 훑어
가슴 깊이 불을 붙여 허공에 내던져진
민초들의 삶의 이야기
해아래 새것이 없나니
언제나 바람은 늘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만석보에 모진포학 짓눌린 설움
가붕개로 가렴주구 견뎌왔네
북풍한설 무명버선코 시린 수족은
몸뚱이 찜질에 꼬치 꿰듯 묶여
광인처럼 말뚝에 대롱대롱
죽어서도 한 서러움 강하류에 묻혔네
정의는 배들평야를 훑으고 달려와
말목장터에서 회오리치며
백산에서 휘몰아 완산으로 내달리니
얼싸안고 민중분기 하늘에 닿았네
봉기구나 봉기구나
고부천에 높이 세운 솟대 끝에
폐정계획 핏빛깃발 휘날리며
새벽을 밝히고 심연의 끝으로 달렸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