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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 없다

마음 둘 곳

by 유진 박성민

“G는 비겁해요. 저를 먼 시골에 버리고 갔어요”

후배 J와 늦은 시간에 전화 통화를 한참 하다가 잠이 확 깨었다. J는 대학생 시절 지도교수인 G가 성정체감(gender indentity disorder)에 어려움이 있다는 동정성 가스라이팅하며 접근하여 사귀게 되었다. 무엇보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정주 공간이 없었던 J는 G가 구해준 시골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다 G는 기혼자인 유부녀와 더블 연애가 공개될 위기에 닥치자 교수라는 지위를 지키기 위해 J를 버리고 떠났다. 한때 이성과 교제를 하려고 하면 노골적으로 방해하였고 졸업 후 알게 되었지만 위계에 의한 권위로 동성애 대상이었던 다른 피해 동기들의 일화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이미 한 자녀의 어머니가 된 J의 솔직한 이야기 너머 취기가 가득 찬 목소리는 밤새 젊은 시절 상처와 원망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픔 속에서도 삶의 희망을 잡고 살아온 J는 간혹 다혈질이지만 정보처리 속도도 빠르고 마음이 넓어 직장 생활도 학업도 가정의 세 마리 토끼를 잡고 잘 살아가고 있었다. 동료들에게 철인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기와의 싸움으로 박사논문을 다 쓰고, 그간 소홀했던 가정복지에 전념하고 있을 때 모르는 사람의 전화가 왔다. 지도교수의 또 다른 박사과정 제자였다. 지도교수가 J의 박사논문이 훌륭하니 받아서 읽고 공부를 하라고 하셨단다. J는 지도교수의 추천이니 기쁜 마음으로 집 근처로 오라고 하여 잉크도 안마른 따끈 따끈한 박사논문을 주었다.


몇 달 후 격양된 목소리의 P가 J에게 전화를 주었다.

“네 논문 도둑 맞았어”

“무슨 소리야?”

“너랑 토론하며 작성한 결론이랑 네 논문 그대로 베낀 논문이 학술지에 실렸어”

“누군데?”

범인은 박사과정 제자와 지도교수였다.

아직 투고도 안한 내 박사논문이 이미 타인의 이름으로 실렸다니 J는 믿기지 않았다.

좋은 글을 보면 훔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지만 그 유혹에서 벗어나 윤리를 지키는 것이 예의이건만 지도교수는 J의 논문도 표절녀의 논문도 안읽고 무엇을 한 것일까. J의 최종 박사논문 결론의 윤문을 위해 갑론을박하며 도와준 P도 어처구니없는 일에 부들부들 화를 냈다.


J는 다음날 지도교수를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말하고 어떻게 해야할지 물어보았다.

그때 항의하러 왔다고 생각한 교수는 J에게 오히려 버럭 화를 내며 표절녀에게 학술지의 게재 논문을 내리라고 했다며, 마지막에 너희 남편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했다. J의 부군은 국내 최고의 대학을 나온 인재로 학계에 본인의 실기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한 지도교수는 입막음만 하려고 하였다. 학장과 총장이 꿈인 지도교수는 제자의 아픔보다 자신의 명예가 중요한 사람이었다.


며칠 후 지도교수에게서 메일이 왔다. 지도교수가 다니는 교회에서 봉사를 하는 표절녀에게 밥을 사주며 위로했다고 하였다. 지도교수에게 야단만 맞고 누구에게도 사과받지 못한 J는 그 상황을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정작 위로받아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

아이를 맡기고 직장을 다니면서 밤 잠 안자며 2년을 꼬박 준비하여 작성한 논문을 도둑맞은 J는 그런 생각을 하면 안되지만 살면서 처음 살의라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인생과 영혼을 갈아 넣은 박사논문을 일순간에 뺏긴 J의 심정은 억울하고 참담했다.


박사의 멍에는 무서웠다. 박사 후의 진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지도교수의 진심 어린 사과 없이 논문을 내렸다고 선언한 것으로 KO패 당한 J는 상실감에 삶의 의욕이 없어졌다. 하지만 표절녀에게 사과문과 공증을 통해 만약의 사태에 대비를 하였다. 표절녀가 발뺌할 것을 대비하여 직장의 동료에게 양해를 구하여 증인이 되어 줄것을 부탁하고 그녀의 사과를 받았다. 그렇게 울면서 사과하던 그녀는 결국 해당 학술지의 논문도 실적을 포함하여 교수가 되었다. 그 후 출장지에서 우연히 만난 표절녀는 장기간의 출장에서 타인에게는 인사를 하면서 J에게 단 한번도 인사를 하지 않았다. 거짓으로 살아와서인지 가책 없이 뻔뻔하였다. 이후 업무상 오히려 일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J도 몇 년 후 교수가 되었다. 지도교수는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노력을 많이 했는데 한켠에 미안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나 보다. 그때 지도교수가 공개강의에서 참고하라고 준 발표자료를 J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덕분에 참고하여 도움이 되었다고 지도교수에게 감사인사를 하였다. 인생 살이가 이렇게 힘들고 어렵다.


남의 논문을 훔친 표절녀는 여전히 대학에 있지만 소속 학과가 없어졌다.

유사한 전공에서 그 교수를 구성원으로 받을 수 없다고 하여 교양학과 교수로 배치되었다는 후문이 들렸다.

결국 자신의 힘으로 일군 실력이 아니기에 표절녀는 전공 분야에서도 표류하고 있었다.

한참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해당 전공 분야에서 교수들의 전공 저서보다 잘 팔리는 공저 전공 도서 중 J의 부분만 도둑을 또 맞았다고 하였다. 표절한 교수는 전공 분야의 현장경험이 없는 교수로 교육청 사업 보고서도 표절로 문제가 된 적이 있지만 최근 교육 관련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경험이 풍부한 J의 도서는 훔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경험과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하지도 집필하지도 못할 글에 왜 탐을 낼까.

그녀는 사람을 잘 믿는다.

오지랖도 넓다.

그녀의 논문과 책을 표절한 사람들은 국내 학력 세탁교수와 일명 미국박사라고 하는 미박교수이다.

반복된 표절 피해에 J도 후회가 밀려왔을까.

이제 그녀는 모든 통화에 녹음 기능을 설정해 놓았다고 하였다.

누가 J를 이렇게 변하게 했을까.


자신의 자식과도 같은 글을 빼앗겼을 때의 상실감은 큰 상처로 남는다.

캐나다에서는 12살부터 교육과정에 ‘다른 사람의 생각을 훔치는 것도 부정 행위(cheating)’라고 초등학교 시기부터 교육한다는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어린 시기부터 도덕성과 양심, 책임의 강조는 기실 타인을 속이지 말라는 것을 넘어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을 것을 교육한다.

저작권에 대한 범죄는 결국 남의 글을 훔칠 때 병존하게 되는 인과관계를 이해하게 한다.

K-culture 시대에 적합한 위상을 갖추고 저작권을 지키고 보호하는 문화운동이 필요하다.

그 운동은 창작자에게 장소, 시간, 마음을 둘 곳이 되는 고향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유지연-캐나다 통신원(2020). 캐나다의 학교 수업 활용을 위한 저작권 지침·제도 현황. 교육정책 네트워크 정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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