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아가는 여정
수년 전 교육대학원 수강생인 교감선생님께서 결혼을 앞 둔 예비 신랑 신부가 혼전 성관계를 했다는 이유로 동네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은 해외 토픽을 공유하며 그 나라에 살았으면 예전에 우리 모두 돌 맞아서 죽었을 거라는 아주 솔직하고 웃픈 소감에 체면을 차리고 있던 모두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상황에 놓인 적이 있다.
한국의 낮은 출생률로 혼전 임신이 흉이 아니라, 복덩이 혼수를 미리 해가는 귀한 선물이라고 여기는 요즘에 국가 간의 극명한 문화 차이를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강신주의 ‘감정 수업’을 읽으며 책 구성의 참신함에 감탄하던 중 이전에 읽었던 책들을 회고하며 ‘야심’, ‘대담함’, ‘탐욕’, ‘반감’ 등의 파트에서 성찰한 키워드는 인간의 ‘위선’이었다.
용기와 비겁함은 대척점에 있지 않지만 과거의 용기 있던 행동이 현재의 새로운 위기 상황에서 과감하지 못하다면 의미 없다는 글귀에서 마음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교육부 평가 지표 결과의 분석 없이 소수 인원의 학과라는 이유만으로 구조조정을 하려고 할 때 해고할 일도 없는데 교양학부나 타과로 소속을 이동하면 될 일을 왜 학과와 학생을 지키려고 싸우냐고 했던 동료 교수가 생각났다. 힘들 때 “딸기 우유 먹으며 힘내요”라고 따뜻하게 응원했던 그 교수는 후일 알게되었지만 우리 학과를 없애려는데 가담한 공과 반사 이익으로 자신이 소속된 학과의 이익을 추구했었다. 타과라고 진로를 선택하여 입학한 학생들을 공중분해 시키려 하는데도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맛난 딸기우유를 권했던 잔인함은 알베르 카뮈의 ‘결국 사랑하는 건 우리 자신’이라는 통찰이었다.
‘감정 수업’ 에서 철학자의 어드바이스가 강력하게 느껴지는 대목이 있어 발췌한 부분이다.
점프대 제일 끝에 서 있을 때, 결단의 순간이 찾아온다.
위기 상황에서 번지점프 하듯 몸을 던졌다면, 지금까지는 용기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원래 비겁하거나 원래 대담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오직 위기를 감내하려고 할 때에만 용기와 대담함은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도 모를 일이다. 위기 상황에서 발을 내딛을지, 뒤로 물러날지 결정하게 된다. 분명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앞으로 발을 내딛을 가능성이 더 커진다는 사실뿐이다.
당시 나는 학생과 학과를 사랑하였고, 몸을 던졌고 학생과 학과를 살렸다.
당시 교육부의 획일적인 대학의 구조조정에서 아쉬움은 학과의 경쟁력이 아닌 힘의 논리로 주인 없는 대학에서 공정한 평가 지표 없이 학생 수 많은 학과가 학생 수 적은 학과를 다수결로 없애기 쉬운 구조라는 것과 국가의 수장이 누구냐에 따라 교육부가 임명한 총장의 폭력성도 비례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폭력성의 여파로 냉정해진 동료 교수들이 함께 상의하고 협력해야 할 사안에 소수학과의 희생을 강요할 때마다 “설마 학생들에게 우리 과만 아니면 된다고 가르치시거나 자제분들을 양육하시는 것은 아니지요” 라고 반문했던 것도 용기였다.
최근 인사혁신처 국민추천제와 관련한 이슈에서도 ‘위선’과 관련된 일화가 떠올랐다.
내게 두 번이나 실망을 주어 연락을 단절한 교수에게서 전화가 계속 왔는데 오랜만에 연락을한 것을 보니 목적이 분명한 일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어 받지 않았다. 과거 절친과 함께 지방에 연수를 들으러 갔을 때 그 교수님의 초대로 차곡차곡 쌓은 곡주를 마시며 나누었던 대화 중 폴리페서(polifessor)에 대한 견해를 나누었었다. 당시 나는 교수가 정책을 제안할 수 있지만 교수와 정치인을 넘나드는 것은 반대한다고 피력하였었다. 교수마다 다르겠지만 나를 포함하여 연구자인 교수들이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경우를 드물게 보아왔기에 혹여 나랏일이 탁상행정으로 왜곡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폴리페서의 당위성을 설파하였던 그 교수님은 이후 해당 지역 교육감 선거 후보로 출마했었고,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모교수님은 소원대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대학교수들의 정치와 관련된 의견은 다양하다.
대학에 와서 연구는 안하고 정치질만 한다고 욕하는 사람
교수도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의견 표명을 해야 한다는 사람
연구자가 학생 지도나 연구에 관심이 없고 정치적이어서 싫다는 사람
해당 전공 분야만 알기에 폭 넓게 보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고 평가하는 사람
이론과 실제와 관련된 정책과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실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등
도덕은 도덕적인 품성이라고 한다.
학계의 모습이 가끔 위선을 넘어 코미디로 보이는 것은 나만의 허망함일까.
인간에 대한 성선설과 성악설의 대립에서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면 누구나 양면성이 있지만
누군가의 논문을 비판하는 국회의원 자신이 누군가의 학위논문이 너무 훌륭하다고 논문 투고와 게재 방식을 모르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학위 논문을 본인을 주저자로, 정작 주저자는 2저자로 둔갑시켜 학술지에 게재한 사례, 원서의 70% 이상을 번역하여 넣고도 편역이나 편저가 아닌 저서로 둔갑시킨 사례, 국외 박사논문의 결론을 그대로 번역하여 한국 박사논문의 결론으로 작성한 사례, 석사논문을 실제로 도와준 연구자를 공동 연구자로 기재하고 싶다고 해도 석사논문은 지도교수하고만 기재해야 하는데 세명으로 기재할 거면 내리라는 교수 등 인간의 욕망에서 투영된 ‘위선’은 정도의 차이일 뿐 생애에 점철되어 있는 조절해야 할 과제이다.
강신주는 카뮈의 철학 “모든 것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인간”에 의하면, 인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맹목적인 삶에 묶여 있다는 걸 인식할 때 삶의 부조리함을 깨닫지만, 그 해결책을 찾지 못한다는 자각으로 인해 ‘구역질’을 느끼고 그 불합리함에 대항하여 희망 없는 반항을 하게 된다고 하였다.
다음 백과사전 사이트에 기재된 콜버그의 도덕성 발달단계에 의하면 25세 이상에 해당 되는 후 인습 수준(Post-conventional level) 6단계인 보편윤리적 원리의 단계 (Universal ethical principles)서 올바른 행위란 스스로 선택한 도덕원리에 따른 양심의 결단이며, 정의와 인간권리의 호혜성(互惠性)과 동등성, 그리고 개인으로서 인간존재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 등을 의미한다. 단계를 올라갈수록 더 광범위하고 복잡하고 추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으며, 감정이입이 포함되고, 사회문제를 일반원리에 근거해서 해결할 수 있게 되며 콜버그의 도덕성 발달방향은 민주사회의 원리와 매우 가깝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수준에서 변함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다고 보았다.
AI시대에 이미 국외 SCI 학술지에서는 Chat GPT를 활용했다는 것을 기재하도록 하고 있다.
티끌과 들보를 못보는 것도 유전의 영향일까.
타인의 티끌을 보면서 자신의 들보를 보지 못하니 모르는 척해야 할까.
정치인이 된 교수와 정치를 하고 싶은 교수 중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교수들에게 도덕성이 못내 아쉬운 이유는 개츠비의 허상이 아니라 명예와 실적이 필요한 교수들의 욕망과 연결된 타락한 내면이 아닐까.
인간은 불완전한 실존이라는 점과 초긍정의 마음으로 다시 보면, 역설적으로 인간의 회한이 속죄와 자기 위로와 연결되어 있기에 폴리페서들은 그래서 속죄와 자기 위로의 정치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오늘 나는 강신주의 감정수업을 읽고 떠오른 경험을 복기한다.
우리의 생은 이루지 못한 꿈을 되뇌며 살아간다.
그러면서 나를 알아가는 여정을 통해 성찰한다.
참고문헌 및 사이트
강신주(2021). 강신주의 감정수업-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