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물원 수의사 Mar 03. 2021

동물원의 아침

나를 싫어하고 좋아하는 동물들

차 한 대를 아내와 함께 사용하다 보니, 아내가 차를 쓰는 날에는 다른 출근 방법이 필요했다. 오랫동안 같은 곳을 출근하다 보니 익숙해진 출근길을 좀 낯설게 만들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집에서 동물원까지 차로 15분, 걸어서 70분, 자전거로는 30분 정도 걸린다. 몇 번 걸어서 가보기도 했지만, 출근시간에 맞추려고 전날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편치 않았다. 현실적인 방법은 30분 걸리는 자전거였다. 자전거에 도시락을 매달고 가는 출근길을 떠올려보니 소박하고 건강했다. 도시락을 싸는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해 매일 같은 반찬을 쌌다. 생양파와 멸치를 냉장고에서 한 움큼 집어넣으면 그게 다였다. 자전거를 타며 몸을 사용하니 단출한 반찬과 밥이 달았다. 차로 달리면 볼 수 없는 것들도 보였다. 건널목을 건너는 초등학생의 흔들리는 실내화 주머니, 가게를 여는 분주한 사람들, 산책 나온 강아지. 골목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게 목례를 하기도 했다.




가는 길에는 언덕이 많다. 지금은 여름이 다가오는 계절이다. 언덕을 오르며 팽팽한 체인을 느끼면 안장에서 버티려 하지 않고 자전거에서 내린다. 걷는 도중 향기에 이끌려 고개를 돌리니 길가에는 깨끗한 찔레꽃들이 피었다. 오른 만큼 생긴 내리막을 달리자 내 몸과 자전거가 만든 바람이 아카시아 꽃을 흔들어 향기롭다. 


김훈 작가는 『자전거 여행』에서 오르막과 내리막이 비기면서, 다 가고 돌아보면 길은 결국 평탄하고 그래서 자전거는 내리막을 그리워하지 않으면서도 오르막을 오를 수 있다고 했다. 평탄해진 길을 뒤로하고 동물원에 도착했다. 영역을 알리는 수사자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동물들의 아침은 먹이를 가져다주는 사육사를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사육사들도 이런 기다림을 알기에 일반 직장인들보다 일찍 출근한다. 추운 계절을 제외하면 낮의 더위를 피해 일해서 좋고, 추운 지방의 동물들은 선선한 여름 아침이 식욕을 돋우게 한다.


나 또한 출근 후 근무복으로 갈아입고 동물원을 한 바퀴 돌아보며 동물들을 관찰한다. 수의사인 나에 대한 동물들의 호불호는 극명하다. 최근 나에게 주사 또는 수술을 받은 동물은 나를 보면 숨는다.





자궁 축농증으로 수술을 받은 암컷 사자 도도는 낮은 자세로 숨어서 나를 노려보고 있다. 수술 후 상처를 확인하고 치료하기 위해 수차례 주사를 맞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요즘 지루한 동물원 생활에 자극을 주기 위해 기부받은 커피콩 자루를 장난감으로 높은 곳에 매달아 주었는데 좁은 바닥을 치고 날아올라 자루를 낚아채는 모습에 감탄했다. 그만큼 건강해진 도도가 노려보니 나쁘지 않다. 


숨어서 나를 보고 있는 또 다른 동물, 표범 표돌이다. 표돌이는 해가 갈수록 더 깊이 숨는다. 매해 실시하는 건강검진 때문인데, 몸 상태를 본능적으로 숨기는 야생동물은 일 년에 한 번 검진을 통해 질병을 조기 진단한다. 표돌이는 열 살이 훌쩍 넘은 노령 동물이라 검진에 더 신경 쓰인다. 표돌이와 동복형제지만 내 발걸음 소리를 듣고 달려오는 표범 직지도 있다. 언제나처럼 한걸음에 달려온다. 


먹이를 주는 사육사를 반가워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수의사인 나를 반기는 동물은 직지가 거의 유일하다. 15년 전 직지의 발에 큰 상처가 났었다. 야생동물을 치료하는 과정에 사람의 체취가 묻어 어미에게 돌려보낼 수 없다고 판단했고, 할 수 없이 사육사가 분유를 먹여 키웠다.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던 직지에게 정이 갔다. 그 뒤로는 직지만큼은 주사를 다른 수의사에게 부탁한다. 동물치료는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일이기에 잘되진 않지만 동물에게 감정을 섞지 않으려 노력한다.


관계를 떠나 사람 자체에 거리를 두는 동물들이 있다. 야생동물이기에 사람을 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매일 보는 아는 동물들이라 마주 보고 안부를 묻고 싶다.


수달 달순이는 몇 해 전 수컷이 죽고 나서는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아 관찰이 되지 않는다. 다행히 밤에는 수영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숙직 근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안심한다.


혼자 있는 얼룩말 하니는 항상 풀이 죽어 있었다. 사회적인 동물이라 혼자 있는 것이 건강에 좋을 리가 없었다. 좁은 우리에 얼룩말들을 계속 데려오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최근 다른 종인 미니 말들을 같이 살게 해 주었다. 아침에 보니 서로 서 있는 거리가 가까워진 것이 다행이다.


수컷 호랑이 호붐이는 철망 앞을 무의미하게 반복해서 왔다 갔다 한다. 이런 호붐이의 행동을 정형 행동이라고 하는데 동물들이 좁은 공간에 살면서 보이는 일종의 각박 행동을 말한다.  호붐이가 현재 살고 있는 공간은 몹시 좁다.  백두대간을 호령하는 호랑이에게 30평 공간이 터무니없겠지만 올해는 조금 넓혀줄 예산이 생겨 설계 중이다. 호붐이의 정형 행동을 보다가 물새장을 바라보면 마음이 좀 편하다. 물새장은 우리나라 기후에 맞는 토종 새들이 비교적 넓은 공간을 날아다니면 사는 공간이다. 동물원에서 태어난 두루미들은 아침부터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다니면서 풀숲에서 벌레들을 찾는다. 





동물원에 사는 자유로운 야생동물을 만나기도 한다. 동물원 정상 부근에 위치한 동물병원을 지날 때면 풀숲에 있다 펄쩍 뛰는 고라니에게 놀라기도 한다. 오래전 누군가가 동물원 정문에 놓고 간 새끼 고라니는 분유를 먹고 자랐다. 다 자라서도 고라니는 직원들이 족구를 하고 있으면 공을 따라다닐 만큼 사람과 친근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야생성을 찾아갔고 얼마 뒤 보이지 않았다. 그 새끼 고라니일 것 같지만 확신은 없다. 다람쥐들이 나무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서로 쫒으며 장난을 치고 있다. 몇 해 전 갇혀 있던 다람쥐들을 동물원 내에 풀어줬다. 좁은 사육장에 있던 다람쥐에게는 느낄 수 없었던 생동감이 있었다. 동물원에는 도토리나무가 많아 잘 먹고 지내는 것 같았다. 매일 아침 다양한 동물들을 만난다. 나를 싫어하는 동물, 나를 좋아하는 동물, 갇혀 있는 동물, 자유로운 동물. 동물을 가두는 낡은 동물원은 소멸의 길로 들어서겠지만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어 오늘도 이곳에서 삶을 이어가는 동물들이 있다. 그들은 그냥 공평하게 주어진 하루를 불평 없이 살고 있을 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