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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물원 수의사 Mar 13. 2021

오창 호수의 아는 오리

동물원 밖 오리 이야기

수년 전 잠실 석촌 호수에 갔다가 크기가 20미터가 넘는 러버덕[Rubber Duck]이라는 대형 고무 오리를 본 적이 있다. 비현실적인 크기에 놀랐고 재밌는 상상이 돼서 즐거웠다. 러버덕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호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들리는 이야기와 지역의 사투리로 짐작해보아 러버덕을 보러 멀리 지방에서 일부러 오신 분들도 있었다. 서울 외에도 홍콩, 오사카, 밴쿠버 등 전 세계 곳곳에서 대형 러버덕이 등장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 대형 러버덕은 네덜란드 예술가가 세계를 여행하는 오리를 콘셉트로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청주시 오창 호수에도 러버덕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오리들이 살고 있다. 오리들은 총 3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수컷 1마리에 암컷 2마리로 보였다. 오리의 외형적인 암수 구별은 소리와 부리의 색깔로 구분을 하는데 소리가 좀 더 허스키하고 부리에 검은 점들 없이 깨끗한 노란색이면 수컷일 가능성이 크다. 3마리의 오리들은 더운 낮에는 풀숲 그늘에서 쉬기도 하고 호수에서 수영도 하면서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다. 먹이를 가져다주는 시민들도 있었는데 누구나의 오리면서 누구의 오리도 아니었다.  언제부터, 어떻게 살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오창 사람들이면 누구나 호수의 오리들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오창 읍사무소에서 전화가 왔다. 오창 호수의 오리들 중 하나가 다리를 절룩거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치료를 해 달라는 시민들의 민원이 많이 들어오는데 문의할 곳이 마땅치 않아 동물원에 연락한 것이라고 했다. 외부 동물 진료는 동물원의 업무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라 고민하다가 읍사무소로 갔다. 

읍사무소 한쪽 구석에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속을 들여다보니 평범한 하얀색 오리가 있었다. 가까이에서 살펴보니 오른쪽 다리 관절이 부어 있었다. 가축의 운명으로 태어난 

집오리는 태어난 지 45일쯤이면 생을 마감한다. 그래서 관절이 아플 정도로 오래 살 수도 없을뿐더러 설령 아프더라도 오리가 병원 치료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환자로서 진료 의뢰가 들어왔고 상자에 갇혀 풀이 죽어 있는 오리의 모습이 신경 쓰였다. 오리가 담긴 상자를 싣고 동물원으로 돌아왔다. 데려온 오리를 일단 격리장에 넣고 조류 의학서적을 뒤적이다가 야생동물인 맹금류에게 쓰이는 재활치료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 대학 동기중 서울의 동물병원에서 개와 고양이에게 재활치료를 하는 친구가 있어 의견을 물었다. 고맙게도 친구는 직접 동물원에 방문하여 오리 다리의 통증을 줄이고 관절세포를 증식시키기 위해 실시하는 레이저 치료법을 알려주었다.  레이저 빔이 눈에 좋지 않기 때문에 시술하는 수의사, 오리를 잡고 있는 어시스턴트뿐만 아니라 오리에게도 선글라스를 씌웠다. 소형견용 선글라스가 오리에게도 잘 맞았다. 또 오리 자신의 혈액을 추출해서 관절에 주입하는 자가혈 치료술[PRP]도 배웠다. 그 후 치료법을 익혀 오리를 서너 번 더 치료하였고, 한 달쯤 지나자 눈에 띄는 효과가 있었다. 불편했던 오른쪽 다리는 관절에서 부종이 빠지면서 땅을 디딜 때 힘이 들어갔다. 오른쪽 다리만으로 땅을 딛으면서 왼쪽 다리를 들어 가려운 뒤통수도 긁었다. 걸음걸이도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오리를 치료하는 동안 다른 소식도 들려왔다. 지금 치료받고 있는 오리가 동물원으로 오기 전 알을 낳았단다. 그 알을 오창에 있는 충북야생동물구조센터에서 가져가 인공부화기를 넣고 돌렸더니 새끼 오리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새끼 오리는 태어나자마자 보게 된 센터 직원을 어미인 줄 알고 졸졸 따라다니고 있다고 했다. 동물원에 있는 진짜 어미에게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축하한다고 말해주었다.

오리가 온 지 5주가 됐다. 오리걸음가 거의 완전해져 오창 호수에 다시 데려다 놓기로 했다. 읍사무소 직원을 만나 오리가 담긴 상자를 같이 들고 다른 오리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돌아온 오리가 반가운 시민들이 모여들어 웅성거렸다. 그러나 정작 오리를 풀어 주자마자 수컷 오리가 달려와 머리를 물었다. 걱정이 돼서 제지하려는 마음도 있었으나 오리 사이의 일이니 오리들에게 맡겨보기로 하고 지켜보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수컷 오리는 돌아온 암컷 오리와 한가롭게 수영을 했다. 안심한 우리들은 오리들을 뒤로한 채 자리를 떠났다. 

다음 날 토요일 아내는 친구들과의 오랜만의 약속으로 들떠 있었다. 그런 아내를 남겨두고 딸 다민이와 강아지 둥이를 데리고 오창 호수로 소풍을 갔다. 사실 오리가 잘 지내는지도 확인하고 싶었다. 멀리서 보니 오리들은 호숫가에 나와 햇볕을 쬐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둥이를 데리고 오리들 곁으로 다가갔다.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경계심이 없는 오리들이지만 데려간 둥이를 보자 갑자기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그 순간 수컷 오리가 둥이 앞으로 나와 암컷 오리를 자신의 몸 뒤로 숨겼다. 강아지가 더 다가오면 부리로 쪼을 기세였다. 어제 암컷 오리의 머리를 물던 수컷 오리가 오늘 보니 약한 암컷을 보호하는 듬직한 수컷이었다. 오리를 보고 있는 어느 가족에게 오리들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렇잖아도 오리 한 마리가 없어져 걱정했는데 다시 돌아와 다행이라고 하였다. 

오창 호수의 오리들은 전시 기간이 정해진 러버덕보다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것이다. 곧 어미를 만나게 될 새끼 오리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니 말이다. 요즘 동물원에는 또 다른 오리가 입원해 있다. 역시 오창 호수의 오리로, 한쪽 눈에 눈곱이 껴 앞을 잘 못 본다고 해서 데려온 것이다. 나는 다시 조류 안과 서적을 뒤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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