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 생전 안 하던 짓을 했다. 베란다로 나가서 화분들을 쳐다보면서 차를 마신 것이다. 당연히 앉아서 마셨는데 등산 의자가 요긴했다.
감사하게도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진 탓도 있고 단독주택 이층이라서 밖에 앉아 있는 것이 무척 상쾌했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넓은 옥상이 있고 강한 햇빛을 피해 구석에 놓아둔 화분들 옆에는 일층 화단에 심어진 뽕나무가 하늘을 배경으로 시원스럽게 뻗어나가고 있었다. 겨우 살려낸 알로에 화분 두 개를 포함해서 화분은 모두 일곱 개다. 그중에는 활짝 핀 꽃봉오리를 포함해서 꽃대가 여덟 개나 올라온 제라늄 덕분에 초록빛 사이에서 훈장 같은 붉은빛도 볼 수 있었다.
내가 이런 여유를 누리게 된 것은 올여름 방학에는 특별한 목표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학만 되면 논문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늘 시달렸는데 한 학기 후에 은퇴하는 이 시점에 논문이라는 목표는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발가락을 다쳐서 가급적 외출을 하지 않고 천천히 움직이며 살다 보니 마음의 조급함이 많이 없어졌다.
삶에 단계가 있다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은퇴를 앞두고 드는 생각이다. 영어에서 졸업식을 뜻하는 commencement가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든다. 은퇴가 내게 영어권 사람들이 즐겨 말하는 “Time to move on!”을 실행할 기회를 제공한다. 어떤 세계로 나아갈 것인가? 여유로운 삶, 바로 슬로 라이프(slow life)다.
지난달에 농촌살기를 할 때 슬로 라이프의 축복을 확인하였다. 내가 묵었던 바깥채 옆에는 집 지을 때 살려놓은 몇 그루의 키 큰 소나무들이 있었고 그 소나무들을 중심으로 작은 둔덕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 둔덕에 여러 가지 야생초들이 자라고 있었는데 일찍 기상하면 아침을 먹기 전 풀밭을 거닐었다. 천천히 어슬렁거리며 야생초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면 기쁨이 벅찰 정도로 차올랐다. 농촌살기를 하는 기간 동안 나는 직업과 관련된 일과 심지어는 사람들과도 차단되어 있었다. 인터넷도 되지 않아 컴퓨터를 만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시간이 많아지니 바람 부는 곳에서 음식을 만드는 일도 손빨래를 해서 본채의 넓은 마당으로 들어가 빨래를 너는 행위조차 기쁨을 주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화분들은 사실 멀쩡한 것이 거의 없다. 어디서 꺾꽂이를 해와서 수간이 구부러졌다든가, 죽어가서 버리려다가 살려냈기 때문에 모습이 엉성하다든가, 최근에 동네친구가 가져다주어 심어놓았기 때문에 아직도 시들시들하다거나 한다. 지금까지 버리기에는 화분들에게 미안해서 그저 그냥 두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화분들이 어제 아침 내게 휴식을 주고 기쁨을 주었다. 보석 같은 꽃망울들이, 새롭게 돋아나는 조그만 잎들이, 본 줄기 옆에 올라오는 새 줄기들이 사랑스럽고 기특했다. 내가 이들 앞에서 차를 마시는 마음의 여유가 가져다준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은퇴 후 나는 발가락 골절 같은 변수가 없더라도 천천히 운신하며 살아있는 자연이 주는 기쁨, 살아있음의 기쁨을 알아채려고 한다. 나의 내면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그렇게 마음 부자가 된 나는 사람들에게 더 친절해지고 더 많이 미소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