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새와 텃새의 본능
‘최근 기후변화로 생태계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이상기류 역시 확산되고 있다.’
철새에 대한 이야기다.
한 생태학자의 기고글이었는데, 철새 중 일부가 텃새화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계절이 바뀜에도 번식지와 월동지를 구별치 않고 안주하는 철새라니.
이른바 ‘계절을 잊은 기러기’들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됐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남편의 베트남 호찌민 주재원 발령이라는 변화는 나에게 선택의 시간을 강요했다.
철새가 될 것인가, 텃새로 남을 것인가.
마침 10여 년 넘게 달려온 일에서도 꼭 해보고 싶었던 기회가 주어졌다.
대부분 프리랜서로 1년 단위 계약을 하는 방송작가에게 ‘쉼‘은 곧 고용불안을 의미했다.
주재원 생활 3년이란 공백기는 너무도 긴 시간이다.
출산 후에도 힘겹게 쌓아온 경력과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기회를 눈앞에 두고 포기한다는 건,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너무 가혹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아홉 살이 된 남자아이에게도 엄마는 필요했다.
사실 이 두 가지만 고민했다면 나는 결국 아이를 선택했을 것이다.
신기하게도 아홉 살 녀석은 가족이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한다는 어르신 같은 철학을 지닌 아이였다.
그런 녀석이 나의 망설임을 눈치챘는지 사춘기를 당겨 쓰듯 심상치 않은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엄마 일이 소중해요? 내가 소중해요?”
연애시절에도 들어본 적 없는 추궁을 매일 들으며 초절정 인기녀가 된 듯 행복한(?) 고민이 이어졌다.
그런데 집착 순정남 같은 아홉 살 아이도 납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남편의 발령 소식이 확정될 무렵, 외할머니의 건강검진 결과가 심상치 않았다.
췌장에서 무려 2센티미터가 넘는 혹이 발견된 것이다.
조직검사를 했지만 췌장의 혹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결국 6개월 정도 크기 변화를 추적 관찰한 뒤 암인지 판단하고 수술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아이에게 엄마인 내가 필요하듯 나에게도 엄마가 필요했다.
그리고 노인이 된 엄마에게도 자식인 내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현실적인 고민도 컸다.
조직검사 기간 동안 알아본 간병비는 하루 평균 십여만 원이 훌쩍 넘었다.
6개월 뒤 만약 암으로 결론이 날 경우 만만치 않은 경제적 후폭풍이 예상됐으므로 돈을 벌어야 했다.
‘K-외동딸’의 숙명이랄까.
기특하게도 아홉 살 집착 순정남은 순순히 외할머니에게 엄마를 양보해 주었다.
대신 나는 계절을 잊은 부지런한 철새가 되기로 했다.
이른바 ‘기러기 엄마’의 탄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