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찾은 대청봉은 그 자리에 있었다. 중청봉에 지어진 대피소가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이 낯설 뿐이다. 봉지 커피 한 잔을 손에 든 채 대청봉을 올려다보았다. 토끼 닮은 뭉게구름이 대청봉을 넘어가고 있었다. 구름 따라 폭설에 갇혔던 삼십 년 전 겨울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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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금세라도 눈이 내릴 것처럼 찌푸려 있었다. 겨울 산행 맛을 보자며 의기투합하여 대청봉에 올랐다. 정상 남쪽 십여 미터에 있는 軍작전용 벙커에서 하룻밤은 보내기로 했다. 벙커는 서른 명을 수용하고도 남을 규모다. 가운데 통로를 중심으로 양쪽에 콘크리트 침상이 만들어져 있고 꽃무늬 비닐장판이 깔려있었다. 겉면은 노출되지 않도록 흙으로 덮여있고, 위장 도색 철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대청봉에서 비상시 대피할 유일한 장소다.
다음 날 아침 밖으로 나가려는데 철문이 열리지 않았다. 일행과 합세하여 밀어도 커다란 바위가 누르고 있는 듯 꿈쩍하지 않았다. 폭설이 내려 철문을 누르고 있었다. 상황이 심각했다. 궁리 끝에 버너 불로 철문을 달궈 눈을 녹여보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눈을 피켈로 파낼 심산이다. 삼십여 분 달구자 주먹 하나 드나들 정도 틈이 생겼다. 몸으로 밀치고, 발로 차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한 시간여 씨름 끝에 겨우 빠져나갈 틈을 확보했다. 소변이 급한 사람은 틈으로 온수를 뿌려 눈 녹이는 일을 도왔다. 틈새로 빠져나가 터널을 뚫기 시작했다. 허리까지 묻히는 것으로 보아 적설량이 일 미터는 넘는 듯하다. 대여섯 걸음 눈 터널을 뚫어 ‘이글루’ 화장실을 만들었다. 폭설은 하룻밤 사이에 우리를 조난자로 만들어 버렸다.
조난 신고할 방법도 없고, 모든 걸 덮어버린 폭설 탓에 길을 사라졌고 꼼짝없는 조난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입장료를 아끼려 매표소를 피해 올라온 탓에 대청봉에 조난자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구조를 기다리는 것이나, 폭설이 녹기를 기다린다는 건 굶어 죽는 거나 다를 바 없는 무대책이었다.
긴 하루가 지났다. 다섯 명이 먹을 식량이 문제였다. 하룻밤 야영하고 내려갈 생각으로 올랐던 탓에 식량이 빠듯했다. 하루 두 끼에 식사량도 반으로 줄였다. 갇혀 있으니 신경만 날카로워졌다. 대화도 줄고, 사소한 이야기가 날 선 공방으로 이어졌다.
눈 덮인 설악산을 하루에도 몇 번 변신했다. 낮에 태양이 눈을 녹여 나뭇가지에 걸어놓으면, 밤엔 달빛이 물방울을 얼려 영롱한 보석으로 만들어 놓았다. 골바람도 변신을 거들었다. 밤사이 습기를 나뭇가지에 매달아 상고대 꽃을 피우느라 분주했다. 건너편 공룡능선엔 수많은 병사와 공룡들이 한데 모여 동계훈련을 하는지 흰색 위장복을 입고 위용을 자랑한다. 화채능선 넘어 동해는 폭설에 갇힌 대청봉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눈을 반죽하여 새하얀 파도를 연신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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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대피소 주변으로 먹이를 구하러 왔었는지 크고 작은 동물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있었다. 진호와 둘이 밧줄을 허리에 묶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발자국을 따라갔다. 강풍이 눈을 몰아놓아 깊이를 알 수 없어 안전 확보를 위한 조치다. 한 길이 훌쩍 넘는 곳도 있고, 바람이 쓸고 간 능선은 속살을 내보이는 곳도 있다. 발자국은 얼마 가지 못해 계곡 방향 바위틈에서 끝이 났다. 긴 막대를 바위틈으로 쑤셔 넣었다. 한 팔정도 들어갔을 때 물컹한 동물 감촉이 느껴졌다. “어! 뭐가 있다.” 토끼, 오소리?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잡겠다는 일념으로 사정없이 쑤셨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는 듯 “꾸욱꾸욱” 소리를 질렀다. 무섭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뛰어나와 물기라도 하면…. 옆에서 계속 쑤시라고 재촉한다. 죽었는지 비명도 움직임도 없다. 바위틈 속에서 꺼낼 일이 문제다. ‘L’ 자 모양 나뭇가지를 집어넣어 여러 번 시도 끝에 꺼냈다. 끌려 나온 건 처참하게 죽은 토끼였다. 미처 식지 않은 선혈이 눈을 파고들며 붉은 핏자국을 남겼다. 진호는 호랑이를 잡은 포수라도 되는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토끼를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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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를 들고 돌아가려는데, 골짜기 방향 커다란 가문비나무 가지에 길쭉한 물체가 매달려있었다. 눈이 덮여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매달린 모양이 미라를 닮았다.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크기나 모양으로 보아 시체를 매단 모습과 매우 흡사했다. 초등학생 정도 크기로 한쪽은 어깨 부분처럼 넓고 반대쪽은 좁아 다리 부분 같았다. 비닐로 단단히 싸맨 모양이 시체를 매달아 놓은 것으로 생각이 굳어졌다.
토끼를 죽인 죗값을 치른다는 생각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잡은 토끼를 팽개치고 도망치듯 대피소로 돌아와 시체가 매달려있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떡하면 좋을지 의견이 분분했다. 내려가면 신고하자는 의견과 사건에 연루되면 골치 아프니 못 본 것으로 하자는 등 묘안이 없었다. 와중에 버린 토끼가 아까웠든지 진호는 토끼 잡은 이야기를 곁들였다. 듣고 있던 영균이가 토끼탕 끓이면 한 끼 식사가 해결된다며 찾으러 가자고 했다. 눈 위에 남긴 선명한 핏자국으로 묻혀있던 토끼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대담하게 매달린 시체를 확인해 보자고 했다. 주황색 나이론 밧줄에 매달린 물체를 움직여 보니 무게감이 있었다.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상체 부분을 벗겨보자고 했다. 방수처리를 한 듯 비닐로 여러 겹 꼼꼼하게 감겨있었다. 비닐을 벗기자 누런 마대자루로 또 한 겹 싸여있었다. 이쯤에서 그만두자고 말렸으나 긴장 탓인지 대답이 없다. 자루를 벗기던 영균이가 한 겹 더 싸맨 듯 비닐봉지 소리가 나는데 촉감이 이상하다고 했다. 두개골 모양은 아닌 것 같다고 만져보란다. 얼떨결에 머리 쪽을 만져보았다. 오래되어 부패된 걸까, 아니면 머리가 잘린 시체일까? 머리 모양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한 겹만 더 벗겨내면 보일 것 같아 숨을 몰아쉬었다. 괜히 열어보아 사건에 휘말리는 것은 아닌지 불안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처지였다. 마지막 자루를 벗기던 영균이가 괴성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라면이다! 라면!”
한동안 말을 못 하고 눈 위에 주저앉아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자루 속에는 라면, 양갱, 캔맥주 등이 가득 들어 있었다. 눈비에 젖지 않도록 비닐로 싸매 보관해 놓은 거였다. 횡재했다며 닥치는 대로 꺼내 주머니를 채우고 그것도 모자라 앞가슴 점퍼 속에다 가득 넣어 대피소로 돌아왔다. 영균이는 그 와중에 죽은 토끼도 함께 가지고 왔다. 라면 시체 이야기로 조난자라는 걸 잠시 잊었다.
불현듯 흥부전에서 호박씨를 물어다 준 제비 이야기가 생각났다. 토끼는 비상식량 있는 곳을 알려주려 왔다가 죽임을 당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날 저녁 토끼탕을 끓였으나 먹지 않았다. 살신성인 토끼가 아니었다면 식량이 바닥나 어찌 되었을지…. 수시로 꺼내온 비상식량으로 3일을 더 버텼다.
대청봉을 넘어가는 토끼 구름은 설악의 단풍을 가슴에 안은 채 천불동 계곡 따라 하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