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덩이가 얼마나 시릴까

미니 스커트 입은 직원은 아랫배를 움켜잡고 폭설을 헤치며 뛰어갔다.

by 이광주

하늘에서 눈사태가 발생한듯하다. 봄바람이 두꺼운 외투를 벗기던 이천사 년 삼월 초의 일이다. 대전을 중심으로 쏟아부은 철 지난 눈 폭탄은 모든 것을 마비시켰다. 그날 우리 일행은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옥산휴게소 십여 킬로미터 전방에 멈춰 있었다.

폭설을 처음 경험한 것도 아니고, 제설능력을 믿었던 터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오전 열 시에 있을 창립기념식 시각에 늦을까 염려되는 정도였다. 짧은 치마를 입은 막내 직원이 추울까 봐 히터를 강하게 틀고, 음악을 듣는 여유도 부렸다. 처음 한 시간은 그랬다. 차량은 도로 위에 얼어붙은 듯 움직이질 않았다. 기념식 시각은 이미 지났고, 어디쯤 오느냐고 묻던 전화마저 끊겼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이 분명했다. 장기전에 대비해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자동차 연료 고갈이 당장 문제였다. 폭설에 갇힌 상태에서 연료가 바닥난다면 추위도 문제지만 긴급 주유 서비스도 불가할 듯했다. 다섯 명이 먹을 것도, 화장실도….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 자동차 시동을 껐다. 빠르게 냉기가 침투해 온다.

“무슨 놈의 자동차 단열이 이따위 야! 시동 끊지 몇 분 됐다고”

누군가 춥다는 말 대신 푸념을 늘어놓는다. 외투를 입지 않은 여직원이 하얀 콧김을 뿜어내자. 경쟁하듯 돌아가며 콧김을 뿜는다. 입들도 질세라 입김을 뿜어낸다.


고속도로에 들어선 지 여섯 시간이 지났다. 참기 힘들었던 남자 직원은 고속도로를 등지고 지퍼를 내렸다. 내가 지퍼 내리기 릴레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여직원 시선을 뿌리치느라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십여 미터 이동하여 지퍼를 내렸다. 체면이고 창피도 눈 속에 묻어 버렸다. 여직원이 바통을 이어받을 차례인 듯 일그러진 얼굴로 불안 증세를 보였다. 한계점에 도달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난감했다. 눈이 문제가 아니라 고속도로에서 차 안에 갇힌 채 창밖을 내다보는 수많은 시선이 문제였다. 짧은 치마 입은 젊은 아가씨가 엉덩이를 까고 쪼그리고 앉아있는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다. 급한 건 알겠으나 대책이 없으니 말을 꺼낼 수가 없다. 눈 딱 감고 볼일 보고 오라는 말은 대책이 될 수 없었다.

몇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맴돈다. 양복 웃옷을 벗어 가려줄까, 눈을 쌓아 가림막을 만들어 줄까. 뒤돌아서서 옷으로 가려준다고 한들 동료직원 앞에서 속옷을 벗을 순 없을 것 같다. 주저하는 사이 점점 부풀어 오르는 풍선은 터질 직전까지 팽창한 듯했다. 식은땀을 흘리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본능적으로 앞에 정차해 있는 버스를 향해 뛰었다. 마음만 뛰어갈 뿐 폭설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노루 걸음이다. 버스에 올라 한복을 곱게 입은 오십 대 중반의 아주머니에게 “우리 아가씨가 쌀 것 같아요. 도와주세요.” 다급하게 큰 소리로 말했다.

여직원은 허리를 펴지 못한 채 아주머니를 따라 가드레일을 넘었다. 아주머니는 빠른 동작으로 춤사위 펼치듯 양손으로 치마를 넓게 펼쳤다. 날개 죽지 밑에 병아리를 숨기려는 어미 닭처럼 치마폭으로 여직원을 감쌌다. 그가 쪼그리고 앉아있는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일어선 그는 고양이가 흔적을 지우듯 발로 눈을 끌어다 덮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

“엉덩이가 얼마나 시렸을까.” 돌아온 그는 열없는 듯 한동안 창밖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가랑이 사이에 두 손을 넣고 비비다가 고양이 세수하듯 얼굴을 비볐다. 차 안팎의 온도가 같아져 회복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반복하게 된다. 몇 시가 되었는지 시계를 보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웅크린 채 대화도 끊겼다. 추위에 배고픔이 더해졌다. 핸드폰마저 배터리가 고갈되었는지 ‘삐-삑’ 경고음이 울린다. 비상용 전화 한 대만 남기고 전원을 껐다. 대책 없이 무작정 기다리다 당분이 고갈되어 저혈당 쇼크가 발생하지 않을까! 앞 짧은 생각뿐이다.

십여 킬로 떨어진 옥산휴게소에서 먹을 것을 구해올 특공조를 선발했다. 젊은 직원 두 명이 자진해서 나섰다. 종류 가리지 말고 최대한 많이 가져오도록 당부했다. 특공조가 출발하고 삼십여 분지나 무모한 짓이라 걸 깨달았다. 휴게소에 먹을 것이 남았을 리 없을뿐더러 오가다 탈진하여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큰 사고로 이어질 일이다.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뜻밖에 돌아오는 중이란다.

특공조 손에는 단팥빵 네 개와 생수 두 병이 들려있었다. 눈을 헤치며 갓길 따라 휴게소를 향하던 중 소방헬기로 공급받은 비상식량을 받아왔단다.

부족한 빵 한 개가 굶주린 인간의 본성을 시험에 들게 했다. 우선 체면이 나섰다. “자네들은 아침도 거르고 왔을 텐데 내 신경 쓰지 말고 한 개씩 먹어.” 젊은 남자 직원들은 정답이라는 눈치다. 모성이 나섰다. 다이어트 중이라 저녁은 먹지 않는다며 사양한다. 잠시 체면과 모성, 눈치와 양보의 시간이 지났다.


고속도로는 하얀 솜이불을 덮어쓴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굳은 허리를 펴려 차 밖으로 나와 움직이던 몇몇 사람마저 어둠이 삼켜 버렸다. 연료가 바닥났는지 엔진 꺼진 시꺼먼 자동차들도 잠이 들었다. 누군가는 취침 자세로 누군가는 묵언 수행 자세로 차 안의 침묵을 깨려 하지 않는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간밤에 동사가 걱정되었는지 아침 햇살이 창문을 두드린다. 어깨가 무겁고, 목을 움직일 수 없다. 라디오를 대전방송 채널에 맞췄다. 폭설 관련 뉴스가 나온다. 백 년 만에 내린 3월 폭설로 시내 모든 도로는 차량 통행이 불가하고, 곳곳에 버려진 차들로 유령도시를 방불케 한다는 뉴스뿐이다. 본사 당직자가 전화를 걸어와 상황을 묻는다. 살아있는지 확인하는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든다. 중앙분리대를 철거하여 상행선으로 우회시킨다는 뉴스만 들릴 뿐. 움직일 기미가 없다.


무기력한 인간과 극한 상황을 극복해 내려는 인간의 동거는 서른네 시간 만에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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