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좋은 걸까? 나쁜 걸까?
술과 언제 인연을 맺었을까! 취기가 입에서 머리로 오르자 엉뚱한 생각이 든다. 첫 만남은 초등학교 1학년 때쯤 막걸리 심부름을 다녀 올 때로 기억된다. 아버지는 집 앞 논에서 잡초 뽑기를 하다 심부름을 시켰다. “막걸리 한 되 받아오너라” 부엌 찬장에서 뚜껑을 끈으로 매단 알루미늄 주전자를 들고 주막으로 향한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뚜껑이 몸통을 때리며 뎅그렁거렸다. 주전자 뚜껑도 발걸음에 장단 맞추느라 추임새를 넣는가 보다. 몇 해를 그랬는지 몸통은 성한 곳이 없다. 삼십여 분 논길 따라 걸어가면 큰 길가 주막이 나온다.
“아줌마 술 받아 오래요.”
“또 외상이냐?”
늘 그랬던 것처럼 한마디 하더니 부엌 뒤 곁에 묻어 놓은 커다란 막걸리 항아리 뚜껑을 열었다. 긴 손잡이가 달린 나무 됫박을 항아리에 넣고는 휘휘 두어 번 젓는다. 철철 넘치게 한 됫박을 주전자에 담는다. 가는 동안 흘릴세라 헌책 한 장을 부-욱 찢어 돌돌 말더니 주전자 꼭지를 틀어막아 준다. 버겁게 들고 오는 주전자는 과하게 마셨는지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꼬르륵댄다. 막걸리 맛이 궁금했다. 틀어막은 주둥이 종이를 뽑고 날씬하고 통통한 꼭지에 조심스레 입을 대본다. 첫 경험은 달콤했다. 심부름 갈 때마다 첫 경험의 달콤함을 잊지 못해 입맞춤 횟수가 잦아졌다. 들킬까 봐 얼굴이 빨개졌다.
사춘기가 되어서도 그 달콤한 첫 경험을 잊지 못해 계속 마셨다. 남녀 또래들이 사랑방에 모여 ‘라면’ 내기 윷놀이를 할 때도 막걸리 한 주전자는 빠트리지 않았다. 많이 마시면 어른이 된 듯 소년들은 경쟁적으로 주둥이를 빨아댔다. 소녀들에게 호기를 보이려는 구애 작전이다. 그래서 사춘기에 술을 마셨다.
중학교 가을 소풍 때 선생님 눈을 피해 몇 녀석이 담배 연기 도넛을 만들기 시합을 하면서 소주를 마셨다. 해방감을 만끽하려는 순간 선생님께 걸리고 말았다.
“이 녀석들 술 마셨지?”
“아닙니다. 미제 콜라를 많이 마셔서 그렇습니다.”
“그래! 다음부턴 콜라도 조금씩 마셔, 취하지 않게.” 선생이 우리한테 속았다며 한참을 키득거렸다. 모른 척 지나쳐 준 선생님이 멋지셨다.
술 취하면 간덩이가 부어오른다고 한다. 간덩이가 아니고 감(感) 덩이가 부어오르는 것이 술이다. 판단력이 흐려져 무모한 용기가 생기고, 자신감도 생긴다. 직장 상사와의 술자리는 아부의 끝판이다. 소위 술 상무도 자생적으로 생겨나고. 진상인 최 부장도 주사를 부린다. 화합 주라며 구두에 술을 따라 돌아가며 한 모금씩 마시게 했다. 찍히면 후환이 두려워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마셨다. 울분을 달래려 끼리끼리 이차로 이어진다. 소맥 잔을 돌리며 부족한 알코올을 보충한다. 억눌렸던 에너지를 발산하며 상사를 씹어댄다. “이렇게 해야만 먹고사나?”라는 탄식을 안주 삼아 마시다 취하면 노래방으로 옮긴다. 화장지로 머리띠를 두르고 각설이 춤을 춘다. 누군가는 등에 화장지 롤을 통째로 넣고 꼽추 춤을 춘다. 박자와 음정은 상관없다. 고래고래 악을 쓰며 불러댄다. 두어 시간 혼을 쏟아부은 콘서트를 끝내고 나면 후련해진다.
술이 얼마나 센지 갈 때까지 마셔본 적이 있다. 고주망태가 된 채 위스키 병나발을 불었다. 넥타이 풀어헤치고, 문어 다리로 갈지(之) 자 걸음을 걷는다. 아스팔트 도로가 벌떡 일어나 광대뼈를 때려도 아프지 않다. 방안에 눕자 천정이 빙글빙글 돌며 아래위로 오르내린다. 히죽거리며 실실 웃어대다 곯아떨어진다.
다음 날 필름이 끊겼는지 기억이 지워졌는지 어젯밤 일이 생각나지 않는다. 오른쪽 광대뼈 부위에 붉은 찰과상 영수증이 붙어있다. 머리가 빠개질 듯 아프고, 속이 울렁거린다. 물 한 모금만 마셔도 즉시 반납한다. 만취 후유증이 오전 내내 괴롭힌다.
오십 대를 넘어서자 술을 마시며 건강을 걱정한다. 위스키 같은 독주보다 와인이나 막걸리 같은 순한 술을 찾게 된다. 값비싼 고급술은 취하기 전 음미하며 마신다. 광란의 노래방 콘서트보다는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룸카페를 선호한다. 친한 사람과는 좋은 안주가 있는 실속 집을 찾아 잘 숙성된 술처럼 진지한 인생사를 논하며 마신다.
마신 술만큼 몸에 경고가 온다. 술을 끊어야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같이 마셔줄 친구도 기회도 줄어든다. 술 한 잔 따라놓고 옆자리 손님을 흘끔흘끔 쳐다본다. “한때는 나도 잘 나갔어.” 혀를 차며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빨리 마시라고 재촉하는 사람도 없고. 각 두 병이 두세 잔으로 줄어든다. 이순의 나이가 되었다는 증거다.
술은 좋은 음식이다. 희로애락에 술이 끼지 않는 곳이 없다. 기쁜 일이나, 견디지 못할 슬픔을 녹여주는 재주가 있는 것도 술이다. 서먹한 관계도 술 한 잔 나누면 형님 동생으로 만드는 묘한 마력을 가진 것도 술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좋은 것만은 아니다. 얼마 전 폭음을 즐기던 직장 동료의 간암 말기 판정 소식을 접했다.
저녁 식탁에 레드와인 한 잔이 올라온다. 술친구는 아내다.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기로 마주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반주라 불리는 만찬 주(酒)의 행복이다. 술 수~을과 함께 살아온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