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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주 Feb 28. 2022

쇤 쑥

쇤 쑥도 어딘가 쓸모가 있다.

  머리가 허옇게 쇤 남자들이 길을 나섰다. 엉뚱하게 쑥을 뜯으러 가는 길이다. 얼마 전, 염 선생이 간식으로 가져온 쑥떡이 발단이었다. 그의 쑥떡 예찬은 다 죽어가는 사람도 살릴 것 같다. 변비가 없어졌다는 것을 시작으로 위장병이 나았고, 소화가 잘돼 음식 중에 최고란다.

  사람도 흰머리 날 때쯤 중후한 멋이 있는데 쑥도 어느 정도 쇠야 향과 약효가 좋단다. 단오 전후가 좋다 하여 좀 늦게 뜯으러 나왔다. 

  오염 안 된 곳을 안다며 염 선생이 앞장선다. 도시개발로 마을 주민이 이주하여 십여 년 넘도록 출입이 없던 곳이다. 사람 대신 쑥과 잡초가 차지하고 있었다. 풀을 헤치고 혹시 있을지 모를 뱀을 나뭇가지로 쫓으며 올라갔다. 일흔 후반의 이 교수가 힘에 부친 듯 곁땀을 훔치며 거친 숨을 내쉰다. 

  십여 분을 더 오르자, 마을 흔적이 나타났다.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심어놓은 것 같은 오가피 밭이 있었다. 버려진 채 무성하게 자란 땅두릅도 있고, 개울가 돌미나리 밭도 있다. 쑥이 쇨 때 온 탓에 다른 봄나물들도 쇠서 먹을 수 없는 상태다. 나물도 제철이 있는 것처럼 사람도 나이 따라 할 일이 정해진 듯하다.    


  염 선생이 쑥 채취 방법을 설명한다. 상단 연한 부분 반 뼘 정도를 잘라, 양파 자루에 꽉꽉 눌러 자루에 가득 뜯으란다. 묵힌 밭에 지천으로 널린 것이 쑥이라 만만하게 생각했다. 그늘 한 점 없는 더위가 문제였다. 한낮의 햇빛은 머리숱이 적은 김 대령의 머리를 집중 공격하고 있었다. 이 교수는 몇 번 구부렸다 펴기를 반복하더니 무릎이 아프다며 투덜댄다. 한 자루를 채우려면 턱없이 모자란 데 반둥건둥 이다.

  새참 먹자며 나무 그늘 밑으로 모였다. 이마에 함치르르 땀방울을 매단 채 모여든다. 시원한 바람이 거든다. 반쯤 얼린 커피를 종이컵에 따랐다. 커피 향이 나무 그늘 밑에 퍼진다. 

  “사 먹는 게 싸겠어요.” 누군가 말을 꺼낸다. “쑥떡은 절대 사 먹지 말래요. 백 프로 물감 섞은 거래요. 이렇게 힘든데 쑥을 넣겠어요.” 서로 마주 보다 웃음이 터졌다. 머리가 허옇게 센 남자들이 둘러앉아 쑥떡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엉뚱해서다. 골프 칠 때는 노년을 멋지게 보내는 끌밋한 은퇴자로 보였는데. 쑥 자루 옆에 끼고 앉아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홀아비다.

  쑥 자루를 보니 어릴 적 생각이 난다. 상처 나면 으깨 붙였고, 쑥대 베어다 모깃불 놓으면 향이 마당에 가득했었다. 이른 봄 손톱만 한 쑥을 뜯어다 국을 끓여주던 어머니 맛도 그립다. 쑥을 뜯으러 나선 것도 이런 추억과 무관하지 않다. 쑥 반, 땀 반으로 양파 자루를 가득 채웠다. 어깨에 멘 자루가 비비적거리며 내려오는 내내 상큼한 향을 풍긴다. 

  다듬는 일은 공동으로 하기로 했다. 자루를 풀어놓으니 산더미 같다. 둘러앉아 일을 분담했다. 억센 줄기를 골라내는 일은 나이 많은 김 대령과 이 교수, 삶는 일은 염 선생, 씻는 일을 내가 맡았다. 뜯는 것보다 할 일이 많았다. 

  다듬으며 수다를 떤다. 우물가 아주머니들 수다는 저리 가라다. 이야기가 살아온 인생사로 넘어갔다. 각자 내면의 깊은 사연이 하나둘 밖으로 나왔다. 이 교수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빨치산에게 살해당한 아버지 이야기다. 가장이 없는 집의 천대와 무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공부를 해야만 했던 대목에선 주름진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어 김 대령이 월남전 참전 이야기로 이어갔다. 미군 헬기에서 뿌리는 고엽제를 온몸에 뒤집어쓰기도 하고. 포화 속에서 참호에 엎드려 살아남은 이야기엔 비장함이 느껴진다. 전쟁터에 간 것도 가난 탓이라 했다. 우리는 나이는 다르나 시대적 성장환경이 비슷하다. 각 분야 전문가로 살아왔지만 지난 직업일 뿐이라며 절대 티를 내지 않는다. 은퇴자라는 공통의 가치로만 서로를 대한다. 

  쇤 쑥 향이 더 강한 것처럼 오랜 세월 묻어둔 사연에서 진한 삶에 향기가 느껴진다. 세월이 쌓은 연륜의 서사다. 젊을 때 몰랐던 진한 인간미가 느껴진다. 

  염 선생이 커다란 통에 물을 끓인다. 쑥은 오래 삶으면 향이 없어진다며 살짝 삶는 것이 중요하단다. 쑥 향과 김이 집안에 가득 찼다. 찜질방에 온 것 같다. 산더미 같더니 삶아 놓으니 턱없이 줄었다. 떡 하기 엔 충분한 양이란다.    


  조치원 시장에서 수십 년간 쑥떡을 했다는 방앗간을 찾아갔다. 먼저 온 아주머니들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흰머리가 듬성듬성 섞인 아주머니가 말을 걸어온다. “남자끼리 웬 쑥떡 이래 유-?” “아! 예 쑥이 변비에 좋다 해서요.” 때마침 기계에선 길쭉한 가래떡이 시원스레 빠져나온다. 이럴 때 하필 변비 이야기를 했는지 머쓱했다. 

  옆에 있던 아주머니들이 우리 쑥을 보더니 한 마디씩 거든다. “아유 너무 쇤 걸 뜯었네. 질겨서 어떻게 먹어요? 늙으면 뻣뻣해져 꺾이지도 않고 쓸모가 없유.”라며 웃더니 안쓰러운 듯 뻣뻣한 줄기를 고르기 시작한다. 누구랄 것도 없이 둘러앉아 골라낸다. 한쪽에선 다된 떡을 포장 중이다. 먼저 떡을 뽑은 아주머니가 가래떡 몇 자루를 한 뼘씩 자르더니 먹어보란다.   

  쑥은 쇠면 쓸모없다며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쇠는 것이 아니라 단단해져 가는 거다. 본질을 잊지 않으려 향과 약효를 축적하는 과정이다. 어린 쑥은 쑥국이나 쑥버무리로 쇤 쑥은 모깃불이나 쑥 탕용으로 요긴하게 쓰일 곳이 있다. 쇤 쑥이 쓸모없다는 건 잘못된 선입견 때문이다. 어린 쑥보다 쇤 쑥이 세상 풍파를 이겨낼 강한 힘과 다양한 경험이 있다는 걸 생각지 않는다.

  나도 젊을 땐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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