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도 시대에 따라 존엄성이 다른 것일까?
충무공 후예가 되어 대한민국 바다를 수호하겠다고 해군에 입대했다. 이유 중엔 세일러복의 매력도 한몫했다. 배의 돛을 닮은 독특한 세일러 깃이 멋져 보였다.
칠십 년대 초 해군 지원은 경쟁률이 만만치 않았다. 합격하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느꼈다. 당당하게 나 해군에 합격했어!라고 말하고 다녔다. 해군에 대한 환상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모진 훈련과 함정 생활의 고단함으로 후회한 적이 많았다. 첫 발령지는 DE(Destroyer Escort)라고 불리는 호위 구축함이었다. 1950년대부터 美 해군에서 20여 년간 사용하다 무상원조로 들여온 낡은 함정이다. 길이 93m, 이백여 명의 승조원이 근무하는 규모가 있는 함정이다. 한 번 출동 나가면 육 개월 정도 바다에 머물렀다. 출동 중 함정 내 생활은 단순했다. 좁은 함 내 환경이 체육활동 등을 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수병(水兵)인 나는 식사 당번이 주요 일과다. 작전부에 속해 있던 터라 부사관이 주 구성원이고 수병은 3명에 불과했다. 식사 당번은 하루 세 번 곡예를 부려야 했다. 1층 취사장에서 50명분의 밥과 국을 알루미늄 대야에 받아 지하 1층 식당으로 옮기는 것이 첫 번째 관건이다. 파도 따라 롤링과 피칭은 계속되고, 식당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45도 급경사다. 뜨거운 국 통 들고 가파른 계단 내려가는 건 짬밥(경험)이 있어야 가능했다. 함정이 한쪽으로 쏠렸다가 원복 되려는 순간의 멈춤이 타이밍이다. 1~2초 사이 두세 계단 내려가 난간에 기댄 채 중심 잡고, 다음 기회를 노린다. 몇 차례 시도 끝에 국 통 운반이 끝난다. 만약 실수한다면 뜨거운 국에 화상 위험뿐만 아니라 50명이 맨밥을 먹어야 한다. 그 대가는 현대판 곤장이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식탁에 차려놓은 수십 개의 식기는 롤링과 피칭 따라 와르르 밀려다니며 괴롭혔다. 쓸려 다니는 식기를 통제하지 못하면 밥과 국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져 난장판이 된다. 한 끼 식사 준비에 기진맥진이다.
함정의 하루는 ‘깡깡’으로 시작한다. “일과 시작 15분 전-” 함 내 방송과 동시 모든 승조원은 담당 구역에서 뾰족 망치로 녹슨 철 부분을 두드린다. 낡은 배를 유지하는 필수 업무다. ‘깡깡’ 철판 두드리는 소리는 해군가에 버금가는 떼창이 되어함 전체에 울려 퍼진다.
“까야-깡~ 깡~깡~깡…!”
업무보다 힘든 건 선임들의 괴롭힘이다. 그들은 지루한 함정 생활을 후임병 노리개 삼아 괴롭히며 즐기는 것 같았다. 장난 삼아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을 수 있는 신세라는 걸 알기나 하는지…?
울산 먼바다로 출동한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 사고가 발생했다. 새벽에 스크루 물거품 속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줄이 발견되었다. 참치잡이 낚싯줄 당기듯 조심스레 당기자, 목을 맨 수병 시신이 끌려 나왔다. 야간 항해 중 히빙라인(던짐 줄)에 목을 매고 함정 후미 바다로 뛰어내렸다. 어떤 이유인지 목맨 줄 한쪽 끝은 함정에 묶어 놓았다. 밤새 함정이 시신을 끌고 다닌 거였다. 신체 일부는 상어의 습격을 받은 듯 훼손된 상태였다. 시신은 수습하여 함정 내 창고에 안치되었다.
그때부터 함정은 유령선으로 변했다. 안치실 보초를 서는 것부터 함정 내 모든 생활이 공포 분위기였다. 진해 군항으로 들어오는 3일간은 유령선의 저주를 받을까?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모든 승조원은 하선이 금지된 채 헌병대 수사를 받았다.
해군 역사상 전시가 아닌 평시 해난 사고 중 가장 끔찍한 대형 사고가 74년 충무(현 통영) 앞바다에서 발생했다. 나와 같이 해군에 지원한 병력 중 1기 빠르게 입대한 159기에서 발생했다.
신병 훈련의 마지막 과정은 이순신 장군을 모신 충무 충렬사 참배다. 이순신 장군의 후예가 되어 바다를 수호하겠다는 선서를 하는 해군의 전통의식이다. 이것을 끝으로 훈련이 종료되고, 다음 날 가족 면회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고대하고 기다려온 순간이 참배의식이다.
기다렸던 그날이 최악의 침몰 사고로 이어질 거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훈련병들의 기대와 달리 2월 2일 충무 앞바다는 영하 20도에 비까지 내리는 궂은 날씨였다. 최대풍속 18m, 파고 1~2m로 어선들도 대피한 상태였다.
훈련병들은 진해에서 완전군장을 착용하고 상륙함(LST-815함)에 탑승했다. 몇 시간 후 상륙함은 충무 외항에 정박하고, 작은 예인선으로 옮겨 타 부두로 이동하는 순서였다. 그날 동원된 예인선은 해군 YTL-30호였다. 이런 선박은 항만 내 대형 선박의 접안을 돕거나, 바지선 같은 무동력선을 예인 하는 용도다. 작은 예인선에 정원보다 두 배 많은 316명이 옮겨 탔다. 그중에는 해양경찰 50명, 해군 103명의 훈련병과 기간 병 6명이 포함돼 있었다.
부두로 향하던 예인선은 강풍과 파도에 휩쓸려 순식간에 전복되고 말았다. 훈련병들은 살아나려 발버둥 쳤지만 불가능했다. 완전군장에다 전투화까지 착용하고 있어, 수영을 할 수 없었다. 영하의 차가운 바다에서 허우적대다 서로 끌어안고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사망자들 대부분은 4~5명씩 엉킨 상태였고, 구조된 인원도 저체온증으로 위험한 상태였다. 특히 단단히 동여맨 전투화가 더 많은 사상자를 발생케 했다는 것이 나중에 알려졌다.
시신을 진해 해군 통제부로 옮겼으나 너무 많아 안치할 장소가 없었다. 임시 바닥에 줄지어 안치하고, 살아남은 훈련병들이 보초를 섰고, 언론은 통제되었다.
이후 충렬사 참배는 중단되었고, 함상 근무자는 전투화 대신 함상화로 대체되었다. 159명의 꽃다운 수병은 바다에 던진 흰 국화꽃처럼 흐지부지 잊혔다. 2007년이 되어서야 이순신공원(통영)에 위령탑이 건립되었다.
지금도 현충일에는 살아남은 159기 동기생들이 동작동 해군 묘역에서 위령제를 지낸다. 요즘 연일 언론에 등장하는 채상병 죽음과 159명의 죽음은 무엇이 다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