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대학 다닐 때 내가 독일에서 귀국한지 얼마 안되는 선생과 함께 니체 세미나를 한 적이 있었다. 이 선생은 다방면에 재주가 많았던 분이다. 독일에서 신학 공부를 할 때 당신의 말로는 피아노를 손가락가 피가 날 정도로 하루에 10시간 이상 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음악을 취미로 좋아하면서 나중에는 작은 오케스트라를 지휘할만큼 상당한 수준이었다. 한번은 연말에 이선생 댁에서 스타디를 하고 있을 때 당시 국립 발레단의 임성남 단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국립 발레단원들이 이 선생과 함께 송년회를 보내고 싶다고 재촉한다는 것이다. 당시 이 선생은 어떤 인연인지는 몰라도 발레단의 단목 역할을 할만큼 발레단원들하고 친했다. 우리는 그날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라는 책을 읽다 말고 선생의 차를 타고 강남에 있는 무용학원으로 향했다. 나는 그때 처음 무용학원이라는 곳을 가봤다. 넓은 홀 안에 대형 거울이 있어서 춤을 추면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끔 잘 돼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니 적지 않은 숫자의 젊은 발레단원들이 환영을 해주었다. 우리 세미나 팀은 대여섯 명 정도였다.
그날 밤 발레단원들과 격의 없이 망년회를 보내면서 멀리서만 보았던 발레단원들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면서 놀란 경험이 있다. 무대위에서 춤을 추던 발레리나의 아름다운 모습과 달리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날씬한 모습 때문이다. 그들이 그만큼 열심히 춤을 추기 위해서는 상상 이상의 날씬한 몸매가 필수적이다. 이런 발레단원들이 몇명씩 짝을 이루어 춤을 추는 모습을 보는 데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일 날만큼 눈이 호강을 했다. 그런데 그것 이상으로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있다. 거진 47년 전 이지만 그 때의 장면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의 내용도 다 기억이 난다. 발레단에서 안무를 맡고 있었던 여성인데 김*자라는 이름까지 기억이 날 정도이다. 그런데 이 안무가의 입담이 보통이 아니어서 그녀를 둘러싸고 여러 사람들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녀의 거침없는 이야기 그 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나는 피아노를 치고 싶었는데 결코 칠 수가 없어.”
“아니, 왜요?”
“내가 음악은 많이 듣잖아. 피아노 곡도 많이 들어서 청음 능력은 상당히 좋지. 그런데 막상 내가 피아노 건반을 누르면 아주 듣기 싫은 소리가 나. 내가 직접 치는 피아노 소리와 내가 늘 들어왔던 피아노 소리 간에 격차가 너무 커. 그러니 어떻게 내가 피아노를 배울 수 있겠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자신이 직접 할 때와 들을 때의 차이가 크다 보니 감히 연주를 배울 생각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글쓰기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말을 잘하는 사람도 막상 글을 써보라고 하면 힘들어 할 뿐 아니라 아예 못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남이 쓴 글에 대해서는 기타 부타 비평을 잘 하는 사람이 자신이 직접 글을 쓰려고 하면 전혀 쓰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왜 그럴까? 아마도 듣는 것과 치는 것, 읽는 것과 쓰는 것, 말글과 문자 사이의 갭이 크다 보면 직접 실행하려는 생각조차 버거울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둘 간의 차이가 크고, 그 차이를 부끄러움이나 챙피로 생각한다면 결코 글을 치기도 어렵고 피아노 건반을 두들길 수도 없기 싶상이다. 설령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질 때 비로소 최소한 시도를 하면서 차이를 메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글쓰기의 경우에는 좀 더 기술적인 면에 주목하면 쉽게 극복이 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말과 글의 차이는 글을 너무 잘 쓰려는 강박이나 혹은 글의 형식이나 스타일에 집착을 하다 보면 글을 쓰기가 힘들다. 그냥 평소 말을 하듯 자연스럽게 쓰면 되는데 그게 쉽지는 않은 것 같다. 이럴 때는 말과 글의 차이를 가급적 줄이고 말하는 습관대로 쓰는 것이 좋다. 우리가 말을 할 때 지나치게 따지지 않는 것처럼 글을 쓸 때도 남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라든가, 이런 표현은 문제가 되지 않는가라는 식으로 따지다 보면 글을 쓰기가 어렵다. 글을 의도적으로 너무 윤색하거나 번쇄하게 만들지 말고 그냥 말하듯이 하면 된다. 그리고 이를 글쓰기의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삼다 보면 점차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어렵지 않게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말과 글의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