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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철 Jul 23. 2024

죽음, 애도의 순간

최근에 여기 저기서 부고 소식이 들린다. 철학자 한형조 교수가 죽었고, 그 다음에는 유명 트로트 가수 현철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고, 오늘은 수십 년 동안 우리 모두 그의 노래를 애창했던 김민기가 죽었다. 그 밖에도 주변의 친구들 사이에서 부고 소식이 들리는데,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부모님 세대가 돌아가셨는데 지금은 당사자 본인의 부고 소식도 들린다. 내가 나이를 많이 먹다 보니 함께 달리던 직 간접적인 인사들의 죽음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은 유한한 생명체에게는 불가피한 현상이고, 넘을 수 없는 한계이다.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기 위해 종교와 철학 그리고 예술 등이 생겼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의연히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설명을 한다.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별개의 세계이며, 영혼은 죽음을 통해 비로소 육체의 감옥을 벗어나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은 자유를 향한 해방의 과정이니 슬퍼할 까닭이 있을까? 소크라테스의 말의 진위를 떠나 소크라테스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나름의 형이상학적 해석을 통해 죽음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사건에 대한 해석이다.


로마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데 최대의 장애물 중의 하나가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생명체는 탄생과 더불어 죽는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명제처럼 죽음은 생명을 가진 생명체들에게 치명적인 한계라 할 수 있다. 부모 자식의 죽음, 사랑하는 이의 죽음, 불의의 사고에 의한 죽음, 전쟁터에서의 죽음 등은 도처에서 접하는 죽음은 모든 인간의 숙명이다. 이런 죽음을 생각하다 보면 도저히 ‘쾌락의 정원’에서 행복과 쾌락을 누릴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에피쿠로스는 이러한 죽음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가장 끔찍한 악인 죽음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오지 않고, 죽음이 오자마자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은 양립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존재에게 비존재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은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에피쿠로스의 죽음에 대한 논박으로 인해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순진하게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술은 죽음이라는 충격적 사건을 해석하는 인간의 정신적 노고 중의 하나이다. 신라의 월명은 누이의 죽음을 보고 <제망매가>라는 시를 지었다. 


"죽고 사는 길이

이 세상에 있으므로 두려운데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하고 가버렸느냐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리저리 떨어질 이파리처럼

같은 가지에 났어도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아, 극락 세계에서 만날 나는 도를 닦으며 기다리겠노라"


이 시를 가만히 음미 하다 보면 누이의 갑작스런 죽음을 대하는 월명의 심사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출가인임에도 불구하고 월명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마침내 이 죽음이 가을 날 낙엽이 떨어지는 것처럼 모든 생명에게 필연적인 사건으로 깨닫는다. 그는 죽음 이후의 세계가 어찌될지 모르겠지만, 그 세계에서 다시 누이를 대하기 위해 나의 삶을 갈고 닦겠다는 다짐을 보여준다. 누이의 죽음을 통해 삶의 도리를 생각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월명의 참으로 깊은 애도와 위안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은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지만 이 죽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살아 있는 자의 삶이 드러날 수 있다. 살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죽음은 한편으로 견디기 어려운 슬픈 사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깨침의 순간이다. 그러니 어찌 마냥 슬퍼만 할 수 있을까?


#삶#죽음#소크라테스#에피쿠로스#월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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