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에 책을 800권 읽었다는 모 여성 평론가의 글로 인해 말들이 많다. 나는 사실 그렇게 읽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어떤 이들은 과시형 독서를 많이 하는 경우가 있다. 독서라는 것은 그 책의 내용을 얼만큼 이해해서 자기 것으로 소화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권 수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읽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염두에 둔다면 그것은 그냥 호사가들의 관심일 뿐이다. 왕년에 내가 하는 식 이상의 의미가 없다. 그런데 묘한게 사람들은 저 숫자에 매이는 경우가 많다. 일종의 이미지 효과와 같다. 아마도 그녀는 그것을 겨냥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지금도 헤겔의 <정신현상학> 한 구절이나 문단을 읽는 데도 한 참이 걸린다. 도대체 이 인간은 어떻게 이런 식으로 하나의 문장에 그렇게 여러가지 의미와 깊이를 담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많이 한다. 사실 그녀가 저 책을 읽었을리 만무하고 읽어도 '뭔 소리여?' 하는 이상의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나이를 먹어서인지 아니면 독서의 내공이 쌓여서 그런지 책을 펴서 서문에 써 놓은 저자의 글만 읽어도 그 책의 내용이 훤히 들어온다. 이런 것은 속독보다 더 빠르게 책을 읽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냥 읽기 쉬운 에세이 물이 아니라 어려운 철학 책, 그것도 내 전공이 아닌 다른 분야의 책을 읽을 때도 그런 느낌이 든다. 저자의 생각이 다 읽혀 버리니까 앞으로 전개될 내용도 훤히 들어온다. 이쯤되면 1년에 8백권이 아니라 한 트럭을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다만 내가 부지런하지 못해서 읽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읽는다고 해서 다 나의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가운데 단 몇 프로, 아주 소수의 내용만이 나에게 도움디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상태에서 읽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누에도 뽕잎을 먹으면 자기만의 명주실을 뽑아내는데, 그렇게 읽고서 무엇을 내놓았는게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결국 이런 것은 어릴 때 애들이 소변을 보면서 누구 오줌 발이 더 멀리 가느냐 가지고 내기 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