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의 젊은 엄마들을 중심으로 갖 태어난 아이들의 영어 발음을 쉽게 하기 위해 성대 수술까지 한다는 것이 어제 오늘 이야기만은 아니다. 얼마나 친미 영어 숭배가 골수에 박혔으면 저런 짓거리를 할까? 일반인들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이다. 그들에게 영어는 단순히 언어 하나가 아니라 부이자 권력에 이르는 강력한 도구이다. 이땅의 지배 엘리뜨들은 언어로 상징되는 생존 기술을 사대 숭배에 두었고, 그 뿌리가 조선의 사대부들의 소중화 사대 한문 숭배에 있다.
조선의 양반집 자제들은 걸음마를 떼면서 부터 유가의 교육목표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위해서 먼저 『천자문』을 읽고. 그 다음에 『소학』과 『대학』 · 『논어』 · 『맹자』 · 『중용』의 사서와 『시경』 · 『서경』 · 『주역』 · 『예기』 · 『춘추』의 오경, 『이정전서(二程全書)』 · 『주자대전』 · 『성리대전』 같은 성리학 서적을 공부하였고, 『자치통감』과 역대의 정사(正史) 및 우리나라에 관련된 역사서들도 읽었다. 그야말로 하나부터 열까지 오로지 중국의 경서들 뿐이다. 게다가 이들의 공부 방식은 서당에서 훈장의 회초리를 맞아 가면서 암송 위주로 이루어졌다. 이런 암송 교육은 종교 교육이나 어학 교육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이론이나 사상을 공부하는 데는 쥐약이다. 공부라는 것이 끊임없이 '왜?'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하나 하나 깨쳐 나가야 하는데 그저 공자왈 맹자왈 하면서 주입식 암송을 하니까 자기 생각이 싹을 키울 수가 없었다. 이런 주입식 교육의 병폐는 소중화 한문 숭배를 뼛속 깊숙히 새겨서 갈고 닦는 데 있다. 어릴 적 부터 배운 이런 교육은 평생 사라지지 않는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지금 관점으로 보면 거의 병리적 수준으로 보일 정도로 사대와 한문 숭배에 집착한 까닭도 어린 시절에 주입식 암송 교육 탓이 클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이런 공부가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그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다. 조선의 유학자들의 암송 실력이 얼마나 뛰어 났으면 임진왜란 당시 납치된 유학자 강항(姜沆)이 책 한권 없는 상태에서 암송했던 것들의 기억을 되살려 책으로 복원시켜 일본에 유학을 전수한 것이다.
지배 엘리뜨들의 사대의 가장 큰 특징인 사대의 생존 기술은 조선이 망한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그들은 무조건 강자에 붙어 그것을 절대적으로 숭배하자고 생각한다. 일제 식민지 시절에는 일제에 붙고, 해방 후 미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부터는 미국에 붙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그들의 생존 기술이다. 이런 사회 현상을 풍자한 것이 전광용의 <꺼삐탄 리> 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이인국 박사는 일제 식민지 시대는 일본어로 잠꼬대를 할 정도로 친일을 하다가 해방 후 소련이 진주하자 소련에 붙어 먹고 그 이후 다시 전쟁이 발발하자 청진기 하나만 들고 월남을 했다가 4.19 이후에는 미국으로 이민을 간 내용이다.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는 소설 속의 한 인물이 아니라 이 땅의 지배 엘리뜨들이 권력에 기생하는 생존 방법이자 기술인 것이다.
이런 전통은 시대를 아무리 달리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사대주의는 대표적인 엘리뜨 중의 한 계층인 학자들에게 그대로 보존되고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그들은 자기 생각과 이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진 외국의 문물이나 사상을 들여오는데 앞장을 서고 그것을 팔아 먹는 일로 자신들의 소임을 다하는 것으로 유세하고 있다. 물론 이런 문물과 사상의 도입이 한 국가의 성장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기여한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주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면 자신들의 사상과 철학을 정립해야 하는데 한국의 엘리뜨들은 그저 어디 새로운 것이 없는가는 데만 눈이 팔려 있다. 그러니 어느 세월에 자신들의 생각을 정립할 수 있고 자신들의 이론과 사상을 만들 수 있겠는가? 앞서 주입식 암송 교육의 대표적인 병폐가 창의성을 말살한다고 했지만, 마찬가지로 한국의 학자들의 가장 큰 병폐는 주체성과 창의성이 없다는데 있다. 가방끈이 길어서 공부는 많이 한 것 같지만, 정작 자기 생각과 철학이 없다. 한 마디로 헛똑똑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부류들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외국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내용이다. 무엇보다 주체성과 창의성이 요구되는 21세기에 가장 중요한 것이 없다면 한국의 미래를 결코 밝게만 볼 수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