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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철 Sep 13. 2024

한국인의 사유방식과 일본인의 사유방식의 차이

교토 대학의 철학과 교수인 오구라 기조의 <조선 사상사>에 보면 사유 방법의 차이에 따라 외래문화를 받아들이는 한국인의 사유 방식과 일본인의 사유 방식의 차이를 지적한 바 있다. 


"첫째로... 일본 문화가 외부로부터 도래하는 문화에 대해 브리콜라주(수선)적인 포섭 방법을 취하는 경향이 강한 반면, 조선은 외부로부터 도래한 사상이 기존 시스템의 전면적인 개변을 추진하는 경향이 존재한다"라는 것이다. 고려 시대에 불교가 사회 변혁을 시도했고, 조선에서는 주자학이 국가의 통치 이념이 되면서 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꿨다. 이런 전통은 현대에 들어서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 공산주의라는 사상(주체사상)이 똑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일본과 다르게 조선에서 '사상의 혁명적인 정치적 역할'의 크기가 막대하다는 것이다.”(<조선사상사>(이신철 역, 도서출판 길, 2022)


단순히 여기에 주어진 것만으로 볼 때 두 사유의 우월성 여부를 결정할 수 있을까? 만약 결정한다면 두 사유 방식 중 어떤 것을 더 우월할까? 사실 이런 문제는 대단히 예민할 뿐더러 거북스러울 수도 있다. 나 자신도 이에 대해 판단하고 싶지는 않지만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이 차이는 대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차이는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의 차이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경험주의자 로크는 경험 이전의 인식을 백지상태(tablula rasa)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인간 인식은 오직 경험을 통해 하나씩 그 백지를 채워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는 인식을 가능케 하는 경험 이전의 틀(a priori/transzendental frame)과 같은 것을 인정할 여지가 없다. 인식은 오로지 외부 세계에 대한 수동적 정보일 뿐이다. 인식은 외부 세계에 대해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외부 세계의 변화, 새로운 등장 등에 따라 함께 변화하는 다이내믹한 성격을 띤다. 이러한 사유방식은 상대주의나 회의주의에 빠질 수는 있지만 민주주의 등의 긍정적 측면이 있다. 


반면 데카르트 이래 대륙의 합리주의자들은 그런 경험을 가능케 하는 선험적 (a priori) 틀의 역할을 강조한다. 모든 인식에는 그러한 인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선험적 인식 틀이 있다. 인식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며 백지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선험적 틀이 있을 때 비로소 인식이 가능하고, 이러한 한 틀의 구성에 의해 인식이 이루어진다. 인간 인식에는 외부 세계의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선험적인 주기판(mainboard)가 있다는 것이다. 칸트의 인식론이 정확하게 이러한 인식론을 대변한다. 대륙의 합리적 철학자들은 이러한 인식이 가져오는 확실성과 필연성, 연역 등의 장점을 특별히 강조한다. 이러한 인식의 대표적 모델이 수학이다. 수학은 경험과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이성의 추리 능력에 기초해 있다. 반면 이러한 인식이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틀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반성하지 못하다 보면 독단(Dogma)에 빠지거나 나르시시즘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눈은 자신을 볼 수 없다. 


다소 도식적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전변식 사유는 경험주의에 가깝고 일본의 브리꼴라쥬적 사유는 합리주의에 가깝다. 각각의 사유가 가진 장단점이 한국인의 사유 방식과 일본인의 사유 방식에 그대로 나타난다. 한국인의 사유 방식은 매번 새로운 것을 찾기 때문에(새로운 것의 변화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늘 변하고 뒤집으며, 따라서 현실적이고 역동적(dynamic)이다. 다만 변화만 추구하다 보면 이러한 사유에서는 축적이 이루어지기 힘들고, 자기 사유도 쉽지가 않다. 오구라 기조가 일별한 것처럼 한국인의 사유는 불교가 들어오면서 전통 사상이 무너지고, 유교가 들어오면서 불교가 억압 폐지되고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또 같은 현상이 벌어진다. 20세기 들어와 마르크스주의가 그런 역할을 담당하고, 그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이 똑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때문에 한국의 철학자들이나 철학계는 늘 새로운 것을 찾는 반면 자기 사유가 없다. 이러한 방식을 계속 반복할 경우 한국인의 사유는 30년이 지나도 똑같고, 100년이 지나도 별로 달라지지 못할 것이다. 혹자는 근대화의 경험이 짧아서 그렇다고 하지만, 일본의 예를 비추어 본다면 결코 짧지 않다.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한국인의 사유 방식의 한계 때문이다. 


반면 일본의 사유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때 절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늘 기존의 사유 체계에 의해 재구성되거나 재해석되고 편집된다. 여기서 기존의 사유 체계는 합리주의자들이 말한 a priori frame과도 같다. 이러한 사유 방식에서는 연속성과 축적이 가능하며, 동시에 자기 사유가 가능하다. 일본은 불교를 받아들일 때 일본식으로 바꿨고, 유교를 받아들일 때도 마찬가지로 바꿨다. 계율을 중시하는 한국과 중국의 불교와 달리 그들은 그런 계율에 얽매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석가모니 보다 소속 종파의 조사 중심이나 대처승 제도, 더욱이 극심한 것은 불교가 토속종교인 신도(神道)와 뒤섞인 신불습합(神仏習合) 현상이다. 일본이 짧은 근대화 기간에 서구의 사상이나 문물을 자기 것으로 소화한 데는 일본식 사유의 구성적 특성이 상당히 기여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사유 방식은 자기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도그마에 갇힐 수 있다.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한 후 곧바로 제국주의(Imperialism)의 반열에 뛰어들고, 나중에는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면서 아시아의 수많은 인민들에게 고통을 준 이유도 따지고 보면 자기반성에 약한 일본식 사유의 한계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과거사에 대해 반성을 하지기 보다는 '통석의 염' 같은 교묘한 말장난으로 호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합리주의가 지닌 독단(Dogma)에 일본인의 사유 방식이 갇혀 있다. 


한국인의 사유 방식과 일본인의 사유 방식 간에 어떤 것이 더 좋고, 어떤 것이 더 우월한 것인가를 따지기는 쉽지가 않다. 서로 간에 장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 간에 상대를 반면의 교사로 생각할 수 있다면 최선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서로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일본식 사유의 장점을 들여다보고 단점을 경계하며, 일본 역시 한국식 사유의 장점을 배우고 단점울 피할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서로 간에 협력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In The History of Chosun Thought, Kyoto University philosophy professor Kizo Ogura points out the difference between the Korean way of thinking and the Japanese way of thinking about foreign cultures. 


“First... Japanese culture has a strong tendency to adopt a bricolage (mending) method of incorporating foreign cultures, whereas in Chosun, foreign ideas tend to push for a total revision of the existing system.” In Koryo period, Buddhism attempted to transform the old traditional thought of peoples, and in Chosun, the new Confusionism revolutionized society by becoming the country's governing ideology. This tradition continues in modern times, with the idea of communism (Juche) playing the same role in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In this context, unlike Japan, the magnitude of the 'revolutionary political role of ideas' in Korea is enormous.” (A History of Korean Thought, translated by Lee Shin-cheol, Book Publishing Gill, 2022)




Can we determine the superiority of the two schools of thought simply from what is given here? This is a very delicate and uncomfortable question, and one that I don't want to judge myself. I don't want to pass judgment on it myself, but I think we need to look at it dispassionately. 




The difference is similar to the difference between passive and active acceptance of an object. This difference can also be seen in the difference between British empiricism and Continental rationalism. Locke, an empiricist, characterized perception before experience as a blank slate (tablula rasa). Human perception only fills in the blanks through experience. There is no room in this perception for anything like an a priori/transzendental frame that makes perception possible. Perception is merely passive information about the external world. Because perception is open to the external world, it is dynamic, changing with it as the external world changes, new things emerge, etc. This way of thinking can lead to relativism and skepticism, but it also has positive aspects, such as democracy. 




On the other hand, continental rationalists since Descartes emphasize the role of an a priori framework that makes such experience possible. Every perception has an a priori frame of reference that allows it to be accepted. Perception is never passive, nor does it occur in a vacuum. It is only in the presence of this a priori frame that perception is possible, and it is the construction of this frame that shapes perception. Human cognition has an a priori mainboard from which it receives information from the outside world. Kant's epistemology represents precisely this epistemology. The rational philosophers of the Continental tradition emphasize the advantages of such perception, such as certainty, inevitability, and deduction. Mathematics is a typical model of this epistemology. On the other hand, this epistemology is likely to fall into dogma or narcissism if it fails to critically reflect on the limitations of the framework that makes it possible. The eye cannot see itself. 


Although somewhat schematic, Korean transformation thinking is closer to empiricism and Japanese bricolage thinking is closer to rationalism. The strengths and weaknesses of each are reflected in the way Koreans think and the way Japanese think. The Korean way of thinking is always changing and reversing because it is always looking for something new (it is dependent on the change of something new), so it is realistic and dynamic. However, if you only pursue change, it is difficult to accumulate in this kind of thinking, and it is not easy to think for yourself. As Ogura Kizo pointed out, Korean thought has been characterized by the collapse of traditional thought with the introduction of Buddhism, the suppression and abolition of Buddhism with the introduction of Confucianism, and the same phenomenon with the introduction of Christianity. In the 20th century, Marxism played this role, and postmodernism has played the same role since then. Therefore, Korean philosophers and philosophical circles are always looking for something new, but they do not have their own ideas. If we keep repeating this pattern, Korean thinking will be the same in 30 years, and it won't change much in 100 years. Some people say it's because of the short experience of modernization, but if we look at the example of Japan, it's not short at all. The more fundamental reason is the limitation of the Korean way of thinking. 


Japanese thinking, on the other hand, never accepts something new at face value. It is always reorganized, reinterpreted, and edited by the existing system of thought. Here, the existing system of thought is like the a priori frame of rationalists. This way of thinking allows for continuity and accumulation, but it also allows for self-examination. When Japan adopted Buddhism, it changed to the Japanese way, and when it adopted Confucianism, it did the same. Unlike Korean and Chinese Buddhism, which emphasize precepts, they are often not bound by such precepts. This is due to the sect's emphasis on investigation rather than Shakyamuni, the monk system, and the tolerance of alcohol and tobacco. The constructive nature of Japanese thought has contributed significantly to Japan's ability to assimilate Western ideas and culture during its brief modernization. At the same time, however, this way of thinking can be trapped in dogmas that do not recognize its own limitations. This lack of self-reflection is one of the reasons why Japan's success in modernization led to its imperialism and later to World War II, which caused suffering to so many people in Asia. This may explain why Japanese people would rather use clever puns like “salt of the earth” than reflect on their past history. The Japanese way of thinking is trapped in the dogma of rationalism. 


It is not easy to say which is better or superior to the Korean way of thinking and the Japanese way of thinking. Each has its own strengths and weaknesses. More importantly, the best results can be achieved if each side can think of the other as a teacher. We need to learn from each other. Korea can learn from Japanese thinking, and Japan can learn from Korean thin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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