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 읽는 정신현상학> 1장 서문입니다. 이 해설서는 총 9장 원고지 150매로 작성되었습니다. 9개의 테마는 서문에 올려 놓았습니다. 이런 테마는 9개 외에 얼마든지 많습니다. 이 해설서를 기초로 확장해서 나중에 원고지 1,000매 정도의 책으로 출판할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존의 어떤 해설서와도 다릅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헤겔이 예나 대학의 사강사로 있던 1807년에 출간한 책이다. 이 책은 헤겔의 청년기 사상을 종합한 결정판이다. 헤겔은 당시 예나 대학의 교수로 있던 친구 셸링의 도움을 받아 프랑크푸르트에서 예나로 옮겨와 그 대학에서 사강사를 했다. 그는 이때 강의 외에도 셸링과 『철학비판잡지』를 간행했으며, 『신앙과 지식』과 『피히테와 셸링 철학체계의 차이점』을 쓰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영국의 정치 경제학을 연구하면서 칸트의 도덕성과 구분되는 ‘인륜성’ 개념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다년간의 연구와 강의 경험이 『정신현상학』을 집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책은 나폴레옹이 예나 도시에 입성할 때 완성되었다고 하는데, 그는 이 책의 원고를 아주 어렵게 출판사로 넘겼다. 이 책은 나중에 철학사가 빈델반트가 기술했듯 워낙 난해해서 읽기가 쉽지 않았다. 친구 셸링은 이 책에 드러난 헤겔 철학이 자신의 철학과 양립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그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이 책은 자연적 의식의 도야(Bildung)의 역사를 기술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의 의식은 오래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했듯, 순수한 호기심(thaumazein) 때문에 그 자체에 머물지 못한다. 이러한 지적 호기심이 인간을 다른 동물과 다르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칸트는 이러한 호기심을 ‘형이상학적 욕구’로 해석한다. 인간의 이성은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완전하고 전체적인 앎을 구하고자 한다. 이런 절대적 앎은 한낱 이념에 불과하지만 그러한 추구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헤겔은 의식이 갖는 이러한 초월의 욕구를 의식의 본질로 본다. 의식은 자신의 본질과 그 자신이 처해 있는 현상 간의 분열을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러한 노력은 의식에게 회의와 절망의 경험을 안겨 준다. 이 과정을 통해 의식은 마침내 자신의 본질과 현상이 일치하는 궁극적인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헤겔은 그것을 자연적 의식의 경험으로 기술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제목이 『정신현상학』이지만, 헤겔은 부제로 ‘자연적 의’의 경험'임을 덧붙이고 있다. 이런 자연적 의식의 경험을 통해 의식은 가장 낮은 단계인 의식에서 자기의식으로, 그 둘의 통일인 이성에 이른다. 어떤 이는 원래 이성 장 까지 기술하는 것이 헤겔의 본래 목적으로 보고, 그 이후 정신 장과 종교 장과 절대지 장은 그냥 짜집기 형식으로 덧붙여진 것으로 본다. 하지만 『정신현상학』의 유기적 통일성을 감안한다면 그러한 주장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헤겔은 정신 장을 시작하면서 그것이 그 이전의 의식과 자기의식 그리고 이성과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 이전의 계기들은 이 정신의 계기를 이루는 추상태일 뿐이다. 반면 정신은 비로소 현실 자체로 드러난다. 그것은 한 민족의 인륜적 삶으로서 역사 속에 현현한 정신의 형태들이다. 헤겔은 근대를 다룬 이성 장과 달리 다시 고대 그리스와 로마로 돌아가 그 시대의 정신을 그린다. 다음으로 이 정신이 붕괴되면서 근대의 분열된 정신, 소외된 정신의 세계를 기술하고, 마침내 칸트의 ‘도덕적 세계관’에서 근대정신의 완성을 본다. 그 다음으로 종교 장과 절대지 장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정신현상학』은 정신의 오딧세이적 경험이면서 동시에 방대한 정신 경험의 스펙타클을 그리고 있다. 헤겔이 이렇게 정신의 직접적 형태인 의식의 일관된 도야 경험을 통해 횡적으로나 종적으로 정신의 운동을 끌어 나갈 수 있는 비밀이 무엇일까? 필자는 그것을 다음의 세 가지 점에서 기술하고자 한다. 첫째, 진리는 전체이다. 둘째, 진리는 분리되고 고립된 것이 아니라 관계지어진 것이다. 셋째, 진리는 실체로서 뿐만 아니라 주체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진리란 무엇인가?’는 철학사에서 오래된 문제이자 여전히 논란이 많은 문제이다.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를 메고 올라가는 예수에게 빌라도가 ‘진리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예수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답변했다. 여기서는 진리가 야기하는 수행적 효과는 언급되었지만,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빠져 있다. 아마도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당연히 생각 했을 지 모른다. 하지만 그 하나님의 말씀을 누가 알고 듣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똑같은 질문에 대해 ‘흰 것을 희다 하고, 검은 것을 검다 하는 것이 진리다.’라고 답변했다. 언어와 그것이 기술하는 사태가 동일한 것을 진리라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생각처럼 단순하지가 않다. 한때는 언어와 그것이 지시하는 사태가 같았다가, 다른 때는 달라지는 경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근대 철학에 들어오면서는 존재의 원인(arche)을 탐구하는 존재론 보다는 그것을 인식 주체가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인식론이 주가 되었다. 여기서 진리는 인식 주체의 인식이 인식 대상과 일치하느냐에 달려 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이러한 인식론이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의 분리를 전제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아무튼 진리는 어떤 철학의 경우에도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가 있다.
헤겔에 따르면 ‘진리는 전체이다.’ 진리는 사물에 대한 모종의 부분적 인식이나 진리가 아니라 전체적 인식이자 전체 자체이다. 칸트에게 있어 이러한 전체성 혹은 총체성은 인식의 궁극적 이념(Ideen)으로서 인간 이성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헤겔은 이러한 전체를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는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꽃봉오리와 꽃나무의 비유를 든다. 꽃봉오리는 꽃나무의 일시적인 상태이지만, 그 상태에서는 꽃나무의 진리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꽃봉오리가 활짝 펴서 꽃이 된다. 그러면 이번에는 꽃이 꽃나무의 진리가 된다. 꽃봉오리나 꽃과 같은 진리는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꽃이 떨어지고 열매가 맺어지면 이제는 열매가 꽃나무의 진리가 된다. 이렇게 본다면 꽃나무라는 전체는 꽃봉오리와 꽃과 열매라는 부분적 진리 혹은 계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들은 일시적인 상태에서 꽃나무의 진리를 드러내고 있지만, 그 자체가 전체적인 진리는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에서 헤겔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할 수가 있다. 헤겔은 자기 이전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이런 부분적 진리를 진리 자체로 생각하거나 혹은 진리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진리는 부분들이 아니라 유기적 전체이다. 각각의 부분들은 이러한 전체 안에서 상호 연관지어져 있다.
둘째, 진리를 구성하는 각 계기들은 경험론자들이 생각하듯 고립적(discrete)이며 분산되어(disperse) 있지 않다. 경험론자들에게 사물의 각각의 인상은 하나하나가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 때문에 흄은 이러한 주장에 힘입어 그것들을 통일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법칙 자체를 부정한다. 반면 ‘우주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형이상학의 격언처럼 헤겔에게 사물들은 상호 연결되고 관계 지어져 있다. 사물들의 이러한 연관성 혹은 관계는 모든 사물이 한계를 지닌 유한한 것이고, 이 유한한 것들은 전체로서의 진리가 될 수 없으며, 이러한 관계로 인해 모든 것이 변화하고 운동한다는 것이다. 오래전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물의 이러한 유한성에 대해 통찰한 바 있다. ‘탄생이 곧 죽음이다.’ ‘만물은 흐른다.’ 사물을 고립적으로 이해하면 이러한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헤라클레이토스처럼 만물이 유전한다고 하면 학문이 성립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이면 모든 것은 변화하고 운동한다는 당연한 진실을 외면할 수가 없다. 헤겔은 유한자가 갖는 원초적 한계와 부정성으로 인해 변화할 수 밖에 없는 사태를 ‘부정적인 것의 자기 관계’로 개념화했다. 개별자 혹은 유한자는 그 자체 부정적인 것으로서, 이러한 부정적인 것은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자기 자신과 관계할 수 밖에 없다. ‘부정적인 것의 자기관계’의 운동을 헤겔은 ‘스스로를 완성하는 회의주의’라고도 표현한다.
셋째, 진리는 실체로서뿐만 아니라 주체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실체는 데카르트에서 스파노자를 거쳐 라이프니츠에 이르는 대륙의 합리론자들에게 중요한 형이상학적 개념이었다. 로크도 인식 바깥의 알 수 없는 x로서의 실체를 인정했다. 데이비드 흄의 회의주의는 이러한 실체를 부정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데카르트에게 실체는 사유로서의 실체(res cognitans)와 연장된 물질로서의 실체(res extensa)라는 두 유한 실체와 신이라고 하는 무한 실체가 있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 달리 스스로 존재하는 자기 원인(causa sui)으로서의 신만이 실체라고 보고 사유와 연장은 이 실체를 이루는 속성으로 본다. 그에게는 오로지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한다. 반면 라이프니츠에게 우주는 수많은 실체들, 즉 모나드들(monads)로 이루어져 있고, 이들은 표상 능력의 차이에 따라 위계(hierachy)를 이루고 있다. 돌과 같은 무기물은 표상능력이 없기 때문에 가장 하위에 있고, 신은 온 우주를 표상할 수 있기 때문에 가장 상위에 있다. 각각의 모나드들은 창이 없지만 우주를 반영하는 역설적 관계에 있다. 칸트는 이들이 주장하는 형이상학적 실체들이 경험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독단에 빠졌다고 비판한다. 헤겔은 이러한 형이상학적 실체가 진리가 아니라 오히려 주체로서 파악될 때 비로소 진리가 드러난다고 본다. 진리는 자기 부정성에 의해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주체로 이해될 때 온전하게 파악된다고 헤겔은 주장한다. 이러한 부정적 주체는 『정신현상학』의 곳곳에서 자연적 의식의 경험을 이끌어 가는 강력한 동력이 된다. 지와 대상의 불일치, 그 자체로 이해된 사물의 모순, 오성의 전도된 세계, 주인과 노예의 분열, 유한자와 무한자를 자기 안에 끌어안고 있는 불행한 의식, 행동하는 양심과 아름다운 영혼 등 정『정신현상학』 전체가 이러한 부정성과 차이로 견인되고 있다.
우리는 『정신현상학』의 이 같은 기본 원리에 입각해서 종래의 다른 해설서와 다르게 『정신현상학』을 이루고 있는 다양한 테마들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오딧세이는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도중에 지중해에서 10년 동안 수많은 경험과 고초를 겪는다. 『오딧세이』는 그런 경험을 그린 한 편의 대서사시이다. 마찬가지로 자연적 의식의 경험으로 이루어진 『정신현상학』에는 수많은 서사들이 등장하고 있고, 이것들 각각은 대서사를 구성하는 테마들이라 할 수 있다. 의식과 자기의식과 이성, 그리고 정신과 종교와 절대지 마다 각각의 의식의 형태를 고유하게 설명해주는 테마들을 이해한다면 서양철학사에서 난해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신현상학』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테마들을 다음과 같은 순서대로 기술할 것이다.
1장 서문
2장. 감각적 확신과 언어
3장. 인정투쟁과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4장. 자기의식의 자유: 금욕주의 회의주의 불행한 의식
5장. 마음의 법칙과 사적 언어
6장. 안티고네: 신의 법과 인간의 법
7장. '프랑스 혁명': 절대적 자유와 공포
8장. 행동하는 양심과 아름다운 영혼
9장. 『정신현상학』의 영향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