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나는 무엇부터 시작을 하지?

9년간의 국경 없는 연애 스토리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한 이야기

by 양원창

1장. 나는 무엇부터 시작을 하지?


서울의 2월은 끝물의 겨울 대학교 졸업식이었다.

잔설은 햇살에 녹고 있었지만, 바람 끝은 아직 날카로웠다.


준호는 졸업가운을 입은 채, 캠퍼스 안쪽 작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형식적인 졸업식은 이미 끝났고, 사람들은 사진을 찍거나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어수선한 축하 속에서 잠시 벗어나, 조용히 고개를 들어 흐릿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야, 너 오늘 웃을 생각은 있냐?"


낯익은 목소리. 인우였다. 짙은 회색 코트에 짧은 머리, 부산 억양이 여전한 친구가 익숙하게 다가왔다. 손엔 편의점 커피 두 잔.


"니 커피. 오늘만 특별하게 단 걸로."


준호는 커피를 받아 들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고맙긴. 우리 이제 뭐 하고 살지?"


인우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그 말속엔 묘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서로를 위로하는 말이 될 때도 있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었다. 멀리서 어머니가 손을 흔들었다.


“준호야, 친구랑도 사진 좀 찍어! 이리 와라!”


준호는 마지못해 일어났다. 인우가 옆에 나란히 섰다.


“형제 아니냐, 우리?”


인우가 웃으며 어깨를 툭 쳤다. 준호는 억지로 웃었지만, 눈가에선 미소가 묻어나지 않았다. 카메라 셔터가 눌렸다. 찰칵. 사진은 그렇게 남았다. 웃고 있는 얼굴들 사이에서, 준호의 표정은 어딘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뒤로 가족사진. 아버지가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는다.


“고생했다. 이제 진짜 시작이네.”


아버지의 손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 말도.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 되뇌었다.


‘무엇을 시작하지?’


졸업이 끝이라는 건 알겠는데, 시작은 어디에서부터 인 건지 알 수 없었다. 친구들 중 누군가는 이미 취업했고, 누군가는 대학원을 갔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예술을 해서 뭘 하지’라는 물음 속에 서 있었다. 알바를 하고,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떨어지고, 또 만들고. 그 모든 시간들이 정말 무언가를 향해 가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저 버티고 있었던 걸까. 카메라 셔터는 연달아 눌렸고, 사람들의 웃음은 부유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옷매무새를 매만졌고, 아버지는 멀찍이 떨어져 담배를 피웠다. 인우는 슬쩍 준호를 옆구리로 툭 쳤다.


"오늘 너 표정, 진짜 사진 망칠 수준이다."


"알아."


"기왕이면 웃자. 졸업은 일단 졸업이잖아."


준호는 작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마침내, 억지로라도 웃는 얼굴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 미소 속엔 분명히, 슬픔이 섞여 있었다. 졸업식이 끝나고도 캠퍼스는 여전히 붐볐다. 꽃다발을 들고 환하게 웃는 후배들, 부모님의 손을 꼭 잡은 동기들, 사진을 찍느라 뛰어다니는 이들 틈에서 준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식당 골목을 지나던 길, 인우가 말했다.


"너 오늘 저녁 약속 있어?"

"없어."

"그럼 우리 학교 앞 그 고깃집 가자. 예전부터 졸업하면 거기서 한 판 하자고 했잖아."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말, 평범한 약속. 하지만 지금 그 일상적인 제안이 다행이었다. 고깃집 안은 이미 붐비고 있었다. 다들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학교 마크가 찍힌 봉투를 들고 웃고 있는 무리들, 사진을 돌려보며 깔깔 웃는 친구들. 인우와 준호는 구석 자리에 앉았다. 고기를 굽는 소리, 된장찌개의 냄새, 익숙하고 따뜻한 공기. 인우가 소주잔에 소주를 따르며 말했다.


"야, 진짜로… 벌써 끝났네."


준호는 조용히 잔을 들었다. 소주는 쓰고, 속은 더 썼다.


"넌, 뭐 할 거야?"

"몰라. 일단은, 회사 준비 계속해야지. 떨어져도… 또 해야지 뭐."

"난…"


준호는 말을 멈췄다. 말하려다 삼킨 문장이 속에 남았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걸 말로 붙잡는 일이 힘들었다.


"넌 뭔가 하고 싶은 건 있잖아. 예술 계속하고 싶지 않아?"

"있지. 근데…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 말에 인우는 잠시 침묵했다. 고기를 뒤집으며, 무심하게 한마디 던졌다.


"근데 준호야. 네가 뭔가를 할 수 없다는 말, 나한텐 그냥 네가 무서워서 멈춰 있는 것처럼 들려."


그 말은 조용했지만, 뼛속 깊이 박혔다.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숟가락만 천천히 움직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도심은 어둑해지고 있었다. 거리엔 졸업 꽃다발이 든 비닐봉지들이 어지럽게 버려져 있었고, 길가의 포장마차엔 취기 오른 대학생들이 웃고 있었다. 준호는 이어폰을 끼고, 익숙한 골목을 지나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방은 여느 때처럼 조용했다. 책상 위에 쌓인 노트북과 공책, 아직 열지 않은 포트폴리오 파일.


그는 조용히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창문 너머로, 옆 건물 창에 반사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무표정하고, 말이 없고, 피곤해 보였다. 그리고 그 얼굴에, 작게 말하듯 속삭였다.


"지금, 내가 뭘 해야 하지…"


그날 밤, 준호는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자꾸만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들. 지나온 날들과, 다가올 날들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그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하지만 머릿속엔 온통 소음뿐이었다. 아버지의 말, 인우의 말, 사람들의 웃음, 그리고 자신의 침묵. 한밤중,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 '졸업 축하해'라는 짧은 메시지. 보낸 사람은 번호만 저장돼 있는, 이름 없는 사람. 준호는 그 문장을 천천히 읽었다. 그리고, 잠시 휴대폰을 내려두었다. 밤이 깊었다.


그리고....... 그 밤은, 생각보다 길었다.

생각보다 긴 밤인 거 같다....


내가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것이 진짜 길의 시작이었는지도 몰라

Creí haberme perdido, pero tal vez era el inicio del verdadero camino.



월,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