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첫눈이 내리던 날>

고요가 깊어질수록 삶은 천천히 제 모습을 드러낸다

by 숨결biroso나


<멈춤의 시간에 스며드는 가장 오래된 순백>



삶의 악보 위에

아무 이유 없이 내려와

한 줄의 쉼을 새기는

순백의 첫눈.


창가에 서면

세상은 흑백의 정지 장면처럼

숨을 고르고,

소리들은 두꺼운 담요 속으로

천천히 잠겨간다.


고독이 가장 투명한 색을 띠는 순간,

그 위에 피어나는

한 장의 수묵화.


발자국이 새겨진 골목은

누군가의 어제를 덮어주는

미완의 지도 같고,

그 위에 흰 백지가

자비로운 망각처럼 내려앉는다.


금세 눈물로 스러질 것을 알기에

작은 눈송이 하나까지

금가루처럼 소중해지고,


내면 깊은 곳에서

오래 묵혀온 그리움들이

조용히 해독되기 시작한다.

눈송이마다

과거의 숨결이 젖어드는 듯하다.


소복이 쌓이는 고요는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게 하는

마음의 첫 세례.

눈이 녹아 현실이 다시 다가오기 전,

투명한 사유에

한 번 더 흠뻑 젖어본다.






첫눈이 내리는 날이면 세상은 어느 순간 낡은 필름처럼 고요하게 멈춘다.
도시는 여전히 움직이지만, 소리는 얇은 설탕막 아래 묻혀버리고, 사람들의 걸음마저 조금 느긋해진다.
그 모든 변화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작은 흰 점 하나가 만든 놀라울 만큼 단순한 기적이다.

창가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면, 눈송이들은 처음에는 먼지처럼 가볍다가 어느 순간 자신들만의 질량을 갖는다.
바람이 잠시 멈추는 틈, 세상은 흑백의 정물화가 되고, 사물들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새로운 의미로 서 있는다.
우리는 그 정지된 풍경 앞에서 문득 자신이 어떤 속도로 살아왔는지 생각하게 된다.
마음 하나 내려놓지 못해 숨이 가쁘던 날들이 고요 속에서 천천히 본모습을 드러낸다.

쌓여가는 눈은 아직 아무 이야기도 적히지 않은 백지의 첫 장 같다.
그 위에 찍히는 발자국은 우리가 살아냈던 시간의 형태이며, 동시에 앞으로 어떤 길을 만들 것인지 묻는 조용한 질문이다.
눈은 곧 사라질 운명에 있지만, 그래서 더 단단하게 우리를 멈추게 한다.
잠시라도 깨끗해지는 마음이 얼마나 귀한지, 우리는 매년 새삼 깨닫는다.

나무 가지 끝에 걸린 눈송이들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흔들리지만, 그 불안함이 오히려 풍경을 빛나게 만든다.
삶의 순간들도 그렇다. 오래 남지 못하기에, 조금 더 깊게 바라보고 싶은 장면들이 있다.
잠시 스쳐 지나간 다정함, 말하지 못한 그리움, 계절을 건널 때마다 조금씩 바뀌는 마음의 결들.
첫눈은 그 모든 감정의 환기이자, 우리의 인간다움을 확인하는 가장 조용한 증언처럼 느껴진다.

첫눈이 오던 날 유난히 또렷하게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속 깊은 곳에 묻힌 문장 하나가 다시 읽히는 순간과 같다.
시간은 많은 것을 희미하게 만들지만, 완전히 지우지는 않는다.
눈은 그 잊힌 감정들을 조심스레 드러내며 우리에게 말한다.
지나간 계절에도 여전히 숨겨진 빛이 있었다고.

눈 내리는 풍경 앞에서 우리는 잠시 짐을 내려놓는다.
조용히 숨을 고르고, 오래 미뤄두었던 마음의 결을 다시 어루만진다.
그리고 이 고요가 흩어지기 전, 삶이 우리에게 건네는 질문을 다시 듣는다.

이 멈춤 이후, 나는 어떤 발자국을 새로 찍게 될 것인가.






흰빛이 내리는 동안 우리는 잠시 다른 사람이 된다.

작게 떨리던 마음이 잦아들고, 오래 잊고 있던 감정 하나가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낸다.

첫눈은 그렇게 삶의 속도를 바꾸고, 마음의 문장을 다시 쓰게 한다.

눈이 멈춘 뒤에도 그 고요가 오래 남기를...



고요가 깊어질수록 창밖의 낯선 춥고 어두운 자리들이 함께 떠오른다.

따뜻한 방 안에서 눈을 바라보고 있는 이 순간에도,

같은 하늘 아래 서로 다른 온도로 하루를 견디는 사람들이 있다.

눈은 모든 지붕 위에 고르게 내려앉지만,

그 고요를 받아들이는 삶의 사정은 그렇게 고르지 않다는 사실이 문득 스며온다.

이런 날일수록 우리는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세심히 주위를 돌아봐야 한다.

내게 머무는 따뜻함이 있다면, 그것이 누구에게든 조용히 전해질 수 있기를.






오늘 첫눈이 내렸습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셨나요?

세상이 하얗게 가라앉는 그 순간, 우리는 늘 어떤 삶의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눈은 매번 같은 색으로 오지만, 바라보는 마음의 온도는 매번 다른듯 합니다.


올해 첫눈은 유난히 조용했고, 그 조용함이 제 안의 오래된 문장 하나를 깨워 주었습니다.
잠시 멈춰 생각하는 순간이야말로 삶을 다시 빚는 자리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우리 마음 위에도 고요한 흰빛이 가만히 내려앉아, 오래 미뤄두었던 마음 하나를 밝혀주기를 바라봅니다.



덧없이 내리는 첫눈 아래, 비로소 멈추어 가장 순수했던 자신과 마주하며 영혼의 쉼표를 찍는다.


by 《내 마음의 풍경》 ⓒbiroso나.



내게 머무는 작은 따뜻함이
어디선가의 차가운 창가에
아주 미세한 빛처럼 닿을 수 있기를.


#첫눈 #겨울산문 #삶의사유 #계절의기억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