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의 삶의 흔적과 기억의 표정
우리의 뒷모습은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남겨진, 누군가의 가장 깊은 기억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평생 동안 주로 정면의 표정을 가꾸며 살아간다. 웃음과 슬픔, 결심과 망설임을 얼굴의 근육으로 섬세하게 조율한다. 그러나 삶의 가장 은밀하고 진실된 이야기는 내가 잘 보지 못하는 곳, 등 뒤에 더 많이 새겨져 있다.
얼굴이 세상과 나누는 대본이라면, 뒷모습은 홀로 감당해 온 세월의 고백이다. 가장 깊은 무게와 오래된 상흔은 언제나 등 뒤에서 침묵하고 있으며, 우리가 뒤돌아섰을 때 비로소 세상은 우리의 진짜 자서전을 읽기 시작한다.
누군가를 떠올릴 때 얼굴을 기억의 지도 위에 먼저 새겨 넣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래도록 마음을 아른거리게 하는 것은 의외로 돌아선 자리의 그림자, 뒷모습일 때가 많다.
떠나가는 뒷모습은 인연의 마침표를 예고하고, 앞서 걷는 뒷모습은 가야 할 삶의 방향을 무언의 지시처럼 느껴진다. 얼굴이 순간의 감정을 담는 유리창이라면, 뒷모습은 수많은 세월이 겹겹이 쌓인 퇴적암과 같다고나 할까. 말없이도 계절과 마음을 품은 표정.
뒷모습은 순간이 아니라 축적이다. 하루가 쌓여 계절을 만들고, 계절이 쌓여 한 사람의 결을 바꾸듯
걸음은 오랜 시간의 지층을 품어 서서히 자기만의 풍경을 만든다. 우리가 누군가의 뒷모습에 오래 머무르는 이유도 아마 그 속에 말로 다 하지 못한 시간의 냄새가 천천히 배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릴 적 비 오는 날 시장에서 장을 보시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내 기억 깊은 곳에 박혀 있다. 한쪽 어깨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장바구니의 무게, 그 짐을 버티느라 굽어진 등의 미세한 떨림. 나는 그 등을 보며 뒤를 따랐고, 그때는 그것이 그저 그날의 피로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지금, 내 걸음에서도 그 등을 닮은 기울기가 배어 나온다. 뒷모습은 유전되어 가장 늦게 깨닫게 되는 가족의 숙명적인 무늬이다. 그 뒷모습은 모진 삶의 중력을 이겨낸 수많은 굳은살로 만들어진 가장 정직하고 따뜻한 건축물이었음을 이제야 알게 된다.
나는 종종 그 시절 시장 골목의 냄새까지 떠올린다.
빗방울 젖은 흙냄새, 비닐봉지 스치는 소리, 그리고 엄마 등에서 번져 나오던 미묘한 온기. 아마도 뒷모습은 기억을 다시 열어주는 가장 오래된 열쇠인지도 모른다.
길 위에서 스치는 뒷모습들은 모두 저마다의 서사를 짊어지고 있다. 허리를 굽힌 노인의 뒷모습은 땅으로 깊이 숙여진 뿌리 같아서 긴 세월 동안 겪어낸 풍파의 지문이 선명하다. 그 등은 세상의 질문을 모두 받아낸 뒤 마침내 침묵을 택한 거대한 캔버스이고,
뛰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은 아직 채워지지 않은 도화지처럼 가볍다. 세상의 무게를 모르는 작은 어깨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솟아오르는 깃털이며, 앞으로 펼쳐질 가능성으로 가득 찬 아직 접히지 않은 지도와 같다.
홀로 걷는 이의 뒷모습에는 스스로 마침표를 찍고 다시 서겠다는 결심의 문장이 깃들어 있다. 뒷모습은 어떤 표정을 짓지 않아도, 걸음의 속도와 기울기만으로 생의 태도를 여과 없이 드러낸다.
그래서인지, 나는 정면보다 뒷모습에서 더 많은 진실을 읽는다. 그곳에는 아직 말로 옮기지 못한 마음의 단서들이 자세를 따라 번져 있기 때문이다.
딸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던 첫날, 교문 안으로 사라지며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던 뒷모습이 내 마음 가장 먼 자리에 남아 있다. 딸의 어깨가 낯선 문턱을 넘는 순간, 나는 딸아이가 나와는 다른 자신만의 길을 시작했음을 젖은 눈빛처럼 실감했다. 뒷모습은 성장의 은유이며, 동시에 필연적인 이별의 시작을 알려주는 묵직한 서곡이었다.
그 뒷모습은 나에게 이제 '말없이 지켜주는 넓은 풍경'이 되어달라고 조용히 당부하는 것만 같았다.
아이의 뒷모습은 내 앞을 걸어가며 내 안에서 또 다른 계절을 열곤 했다. 뒷모습을 지켜본다는 것은
사랑이 한 걸음 뒤에서 자라는 방식이기도 하다.
어느 날, 남편의 뒷모습을 따라 골목을 걸은 적이 있다. 말 없이 걷는 시간이었지만 그 익숙한 보폭, 고개를 드는 각도, 변함없이 이어지는 그림자에서 묘한 안심이 찾아왔다. 오래 함께한 이의 뒷모습은 예측 가능함이 주는 신뢰의 모양이었다. 그 반복되는 리듬 속에서 우리가 같은 속도로 세월을 건너왔다는 사실이 조용히 증명되었다.
뒷모습은 침묵하는 성벽, 그리고 가장 안전한 안식의 자리였다.서로의 뒷모습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은 함께한 시간이 만든 아주 깊은 풍경을 공유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느 철학자는 '걸음은 기억을 품고 있다'는 깊은 사유를 남겼다. 뒷모습은 그 흐르는 기억의 표정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뒤에 남겨진 가장 깊고 고유한 기록이 된다.
뒷모습은 흘러가는 기억의 표정이다. 우리는 늘상 앞을 보며 오늘을 살아가지만, 뒷모습은 한 존재의 삶이 스스로를 증명하는 가장 웅장하고 솔직한 자서전이 된다.
나는 이제 뒷모습들을 무심히 스쳐 지나치지 않는다. 거기에는 그날의 습도, 마음의 기울기,
지나온 삶의 흔적이 고요히 겹쳐 있기 때문이다.
오래 바라보면 그 뒷모습이 조용히 속삭인다.
“나는 이렇게 버텨왔어. 너는 지금 어떤 마음으로 다음 걸음을 걷고 있니? 네 뒤에는 무엇이 남겨지고 있니?”
오늘 남기는 걸음이 내일 누군가의 가장 깊은 기억이 되기도 한다. 가장 아름다운 뒷모습은 흔들리면서도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다.
사람을 떠올릴 때 얼굴보다 ‘뒷모습’이 더 마음에 남을 때가 있습니다. 돌아 서는 엄마의 등, 낯선 문턱을 넘던 아이의 어깨, 같은 보폭으로 걸어주던 배우자의 그림자...이 조용한 풍경들이 나를 자라게 하고, 나를 붙들어준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통해 말하지 않아도 남는 이야기들을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뒷모습은 나를 지나온 사람들의 언어이자, 내가 누군가에게 남기고 갈 풍경이라는 생각으로 이 글을 써 내려갔습니다.
지금 우리의 뒷모습은 누군가에게 남겨질 가장 깊고 가장 따뜻한 메시지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의 걸음이 누군가의 하루에 잔잔한 안심으로 닿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등도 누군가의 풍경이 되고 있습니다.
by 《내 마음의 풍경》 ⓒbiroso나.
오래 바라보면 뒷모습은 얼굴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건네고 있다. 뒷모습은 걸어온 시간의 초상이며, 삶의 가장 솔직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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