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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구 Jul 24. 2022

농막 잔디밭의 풀을 뽑으면서

영월 농막의 잔디밭이 풀밭으로 변해 버렸다. 모질기로는 둘째가라면 서운해할 바래기 풀만도 버거운데 무 잎새만큼씩 자란 민들레까지 가세하여 잔디는 아예 보이 지를 않는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할 지경이다. 영월 법흥사 인근 산자락에 터를 잡고 가꿔온 이래 잔디밭이 이토록 완벽하게 풀밭으로 변한 적은 없었다.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다고 자부해왔는데 졸지에 무인지경이 돼버렸다.     


햇수로 17년, 평소 친분이 있던 이웃 두 분과 함께 500여 평 땅과 허름한 컨테이너 농막을 인수하고 틈나는 대로 오가며 지극정성 가꾸었다. 셋 다 경험 없는 데다 주말에나 시간을 낼 수 있다 보니 시행착오도 많고 일의 진척도 느렸지만 다른 사람 손을 빌리지 않고 텃밭을 만들고, 나무와 꽃을 심고, 앞마당에는 제법 널찍한 잔디밭을 만들었다. 그런 노력에 화답하듯 시간이 흐르면서 제법 그럴듯한 쉼터이자 놀이터가 꾸며졌다.  

   

농막을 유지하면서 제일 골칫거리는 단연 풀 관리다. 농부에게든 전원생활자에게든 가장 힘들고 골치 아픈 게 뭐냐 물으면 주저 없이 ‘풀’이라고 할 것이다. 뽑아도 뽑아도 어느새 머리를 내미는 것이 야차(夜叉)인가 싶을 때도 있다. 특히, 여름 이 무렵에는‘뽑고 뒤를 돌아보면 그 새 새로 난 풀이 한 길은 자라 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우리 역시 풀은 단연 최고의 골칫거리이자 끝이 보이지 않는 숙제다. 그래도 텃밭이든 잔디밭이든 제초제 한 번 뿌린 적이 없었다. 자연이 좋아 먼 이곳까지 왔는데 농약을 쳐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있어 손수 풀을 뽑고 꽃과 나무와 잔디를 가꾸어 왔다. 그런 노력 덕분에 텃밭이며 잔디밭 모두 주말용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끔하게 유지되어왔다. 그렇게 정성껏 가꿔온 잔디밭이 일순간에 풀밭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풀이 눈에 띄게 늘기 시작한 것은 대략 2, 3년 전쯤부터다. 김매기를 전담하다시피 했던 내가 주말 출근이 일상이 되면서 농막을 오가는 횟수가 뜸해졌고, 그새 풀 자리가 넓어지기 시작하였다. 가끔 와서 보면 잔디밭은 물론이고 농막 주변으로도 풀이 우거져있기 일쑤였다, 뿌리째 뽑아내지는 않고 잔디깎이로 잎과 줄기를 잘라내기만 되풀이하는 동안 조금씩 세력을 키운 녀석들이 올여름 화산이 터지듯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한 것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못 다닌 입장에서 누구를 탓할 것은 못 되지만, “그때그때 조금씩만 뽑아 줬어도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아쉬워하면서 함께 간 친구와 한 시간 가까이 풀을 뽑았다. 참 단단히도 뿌리를 내렸다. 겨우 네댓 평 뽑은 풀이 작은 동산처럼 수북해졌다. 풀을 뽑아낸 자리에 남은 잔디는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볼품없이 여위어 있다. 이대로 한 달만 지나면 잔디는 씨가 말라버릴 것만 같았다.     


종일 매달린다고 해도 끝장을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데다, 그대로 놔두면 금세 풀씨까지 맺어 걷잡을 수 없겠다 싶어 일단 뽑기를 중단하고 잔디깎이로 밀어버리기로 했다. 밑둥치까지 잘라내면 급한 대로 더 퍼지는 것을 막을 수는 있겠다 싶었다. 기계도 힘에 부치는지 수시로 작동을 멈춘다. 풀이 무성한데 다 간밤에 내린 비에 풀잎이 흠뻑 젖어 있는 탓이다. 힘겨워하는 기계를 달래고 어르면서 2시간이 넘게 작업을 하였다. 말 못 하는 기계지만 힘든 것은 사람이나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툰 호미질 몇 번에 지레 지친 친구는 혼자 애쓰는 내가 안쓰럽고 답답했는지 그렇게 힘들일 게 아니라 잔디를 걷어내고 자갈이나 디딤돌을 깔아버리란다. 정 잔디밭을 포기 못 하겠으면 남들처럼 제초제를 뿌려버리란다. 농약 한 번이면 깨끗해질 것을 왜 그렇게 힘을 들이냐며 혀를 찬다. 틀린 말은 아니다. 가끔 맹렬한 땡볕 아래 쭈그리고 앉아서 풀을 뽑다 보면 유혹이 생길 때가 없지 않다. 그러나 아직은 잔디를 걷어낼 마음도, 농약을 칠 생각도 없다. 삭막한 돌 마당보다는 맨발로 걸을 수 있는 초록빛 생명의 마당이 좋다.


나를 포함해 영월팀 세 명 모두 이제는 은퇴자들이다. 두 분은 막역한 친구 사이로, 공짜 지하철을 탈 수 있는 나이를 훌쩍 넘겼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풀이 웬만큼 자라도 못 본 척하거나 입으로 걱정만 앞세우거나 한 경지를 터득한 도인(道人) 같은 말씀을 한다. 한 분은 아예 쭈그리고 앉아서 하는 일은 못 하겠다고 선언을 해버렸고, 다른 한 분은 “풀이 나면 좀 어떤가? 풀이 나면 나는 대로 즐기면 되는 것 아닌가?”하면서 풀쯤이야 어찌 되었건 문제 될 것이 없다는 투다.     


나는 아직은 두 분과 생각이 다르다. 아직은 풀에 굴복할 마음도 없거니와 풀을 보면서 도사(道士) 연할 생각도 없다. 풀이 무성해 있으면 마음이 편치 않고 어수선하다. 80이 훌쩍 넘은 부모님이 사시는 시골집과 집 앞 너른 밭은 언제 가봐도 잡초 하나 없이 말끔하다. 수십 년 동안 그런 정경을 봐와서 그런지 힘이 들어도 기어이 정리를 해야 마음이 편하다. 말끔하게 정리된 것을 보고 있노라면 힘들었던 것쯤은 쉬 잊게 된다. 풀을 뽑다 보면 어느 순간 힘들다는 생각조차 잊기 일쑤다. 집안일도, 복잡한 세상사도 다른 세상 이야기처럼 아득해진다. 육체적인 고통을 통해 깨달음을 구하는 종교인들처럼, 내게 김매기는 무념무상과 망아(忘我)의 경지로 통하는 가장 쉽고 확실한 길이다.     

 

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이들에게는 한심하고 가소로운 소리로 들리겠지만, 전원생활은 도시인들을 시인과 철학자로 만든다. 자연 그 자체가 주는 신비와 함께 도심에서 경험하지 못한 크고 작은 체험을 하면서 어떤 사람은 시인이, 또 어떤 이는 철학자가 된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잔디밭의 풀을 뽑으면서도 철학자가 되곤 한다. 철학자보다는 수행자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무성한 풀은 내 마음속에 뿌리를 내린 망상이고 욕심이고 잡념들이다. 풀을 뽑는 행위는 그것들을 뽑아내는 수행이다. 바래기 풀처럼 사납고 끈덕지게 자라고 퍼지는 잡념들을 정리하고 맨발로 걸어도 거칠 것 없는 초록빛 잔디밭이 만들어질 때 희열이 솟구친다. 그래서 힘들어도 힘든 것을 잊고 다시 또 쭈그리고 앉게 된다.   


잔디밭에는 잔디를 닮은 녀석들이 많이 난다. 띠 풀과 함께 바래기 풀이 대표적인데, 아직 어린 풀일 때는 잔디로 착각하기 일쑤다. 용케 사람의 눈길을 피했다 싶으면 무서운 기세로 번식을 한다. 밭 한 뙈기쯤은 순식간에 잠식해 버린다. 제초제를 살포해도 잎만 누렇게 마를 뿐 뿌리는 죽지 않고 얼마간 비실대다가 되살아나기 일쑤고, 비라도 한 번 내릴라치면 금세 기운을 차린다. 참 독하고 강한 녀석들이다.      


그런 녀석들을 보면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다. 내 마음 밭에는 어떤 풀들이 자라고 있는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자란 잡초는 없는지, 띠 풀이나 바래기 풀처럼 잔디와 비슷한 모양으로 눈을 속이고 자리를 넓혀가는 것들은 없는지 살핀다. 풀이 나면 나는 대로 살아갈 것인지, 부모님의 밭처럼 말끔하게 정리를 할 것인지 생각한다. 다시 살아날 것을 알면서 내성을 키우고 땅을 오염시키고 다른 생명에까지 해를 입히는 제초제를 뿌릴 것인지, 힘들어도 한 뿌리 한 뿌리 뽑아낼 것인지를 생각한다.     


다행히 마음과 함께 몸도 17년 전 처음 땅을 마련하고 신명에 겨워 일을 할 때의 열정을 기억하고 있다. 버려두면 잡초로 무성 해지는 것은 땅이나 마음이나 매한가지니 힘들고 더뎌도 한 뿌리 한 뿌리 캐내자고 열정이 내게 말을 한다.      


묵묵히 뽑다 보면 가을 무렵에는 초록빛 융단을 닮은 옛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바래기 풀처럼 사납고 끈덕지게 자라고 퍼지는 내 마음 밭의 잡념들도 정리가 되고 맨발로 걸어도 거칠 것 없는 파란 잔디밭이 만들어져 있을 것이다. 내일, 2박 3일 일정으로 농막에 간다. 휴식은 언감생심, 순전히 김매기를 위한 여행이 될 것 같다. 힘들여 뽑다 보면 어쩌면 구경(究竟)의 희열도 만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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