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하세요?

by 이윤구

친한 지인한테서 질문을 받았다. “퇴직하니까 편안하세요?”


지인은 대화 중 별생각 없이 가볍게 던진 질문일 텐데 나는 즉답을 하지 못하고 잠깐 생각을 해 보았다. ‘나는 퇴직해서 편안한가?, 퇴직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거지?......’ 심호흡을 몇 번 할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 “편안해지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가벼워진 것 같다”라고 대답했다.


이제는 그만뒀지만, 한동안은 퇴직 후 며칠이나 지났는지 헤아려 보고는 했다. 무슨 미련이나 아쉬움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다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내가 어디쯤 서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좌표를 찍어봐야겠다는 생각에 가끔 지나간 날 수를 헤아려보고는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굳이 좌표를 찍지 않아도 길을 잃지 않을 것 같고, 제자리에 주저앉아 있지 않을 자신감도 생겼다. 그래서 오늘이 며칠인지, 몇 날이 흘렀는지 헤아려보는 것을 그만두었다.


퇴직하니까 물론 편안하다. 오늘은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일어난 일들을 어떻게 처리하고 수습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어떻게 하면 일어나서는 안되지만 일어날 수도 있는 일들을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머리를 싸매지 않아도 되니 편안하다.


늦잠을 자도 되니 편안하고, 늦게 자도 다음 날이 걱정될 것 없으니 편안하다.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을 선택 수도 있고, 아예 안 할 수도 있으니 편안하다. 무엇보다도 나를 지켜보는 누군가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우니 편안하다.


그렇지만‘편안해졌다’보다는‘가벼워졌다’는 표현이 적절한 것 같다. 30여 년 동안 매 순간 어깨를 누르던 부담들이 떨어져 나가던 순간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내 어깨와 머리를 짓누르던 중력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던 그 찰나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내게 퇴직은 그래서 편안함보다는 가벼움이 더 적절한 형용인 것 같다. 물론 모든 부담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가장으로서 짊어져야 할 책임 등 숙명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할 부담들이야 퇴직을 하였다 해서 사라질 리 만무하다.


다만, 직장인으로서 짊어질 수밖에 없었던 책임과 얽히고설킨 관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은 중력에서 벗어난 것만큼이나 나를 가볍게 만들었다. 몸과 마음의 진액이 남김없이 소진돼 있던 내게는 퇴직이 곧 해방이었다.


특히, 마지막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입고 있던 소위‘중책’(重責)이라는 옷은 젖은 솜옷처럼 무겁고 버거웠다. 그 옷을 벗은 순간 심해 저 밑바닥에서 순식간에 구름 위로 떠오른 듯 심신이 모두 가벼워졌다. 물러나면서도 한점 아쉬움도 미련도 없이 순도 100%의 순수한 해방감만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100% 순수하게 나를 연소하였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후련함이었다.


석 달이 넘게 지났지만, 퇴직자로서의 생활이 물리지도 지치지도 않는다. 소소하지만 스스로 그어 놓았던 선을 넘나드는 것이 재미있고, 봉인해 놓았던 욕망의 비밀 상자를 푸는 것이 즐겁다. 선을 넘고, 욕망 상자의 봉인을 풀었다 하니 불순한 상상을 하는 이도 있을지 모르겠다.


내게 선은 스스로 씌워 놓았던 굴레이자 가시철조망이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그걸 내가 할 필요가 있을까’, ‘뭐 하러 그런 걸 해’라고 망설이고 자조하며 밀쳐 두었던 것들이다. 욕망의 비밀 상자란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었던 소망들을 넣어두었던 상자일 뿐이다.


온라인 글쓰기 플랫폼인 브런치에 쉬지 않고 무언가를 쓰는 것이 그것이고, 나 자신에게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깨는 계기가 되었던 포항 송도 해변의 버스킹에서 자진해서 노래를 부른 것이 그것이고, 장애인 관련 강좌를 들으며 생각의 편협함을 깬 것이 그것이고, 맨발 걷기 모임을 만들어 동네 사람들을 모아 함께 걷기 시작한 것이 그것들이다. 소소하고 평범한 것들이지만 그것들로 인해 비로소 무채색 내 인생을 일곱 색깔 무지갯빛으로 다채롭게 물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그것’들을 한 가지씩 늘리면서 30여 년 동안 한 점에 머물러 있던 시야와 생각의 지평이 조금씩 넓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살면서 스스로 만든 두껍고 단단한 껍질 속에서 탈출하면서 조금씩 더 자유로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더 이상 내 안의 모든 힘을 한 점에 모으려 애쓰지 않는다.


누군가 내게 퇴직을 하니 어떠냐고 다시 묻는다면 이제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편안해지기도 하였지만, 참 가벼워졌고 가벼워진 만큼 자유로워졌다고, 오롯이 나로 살게 되었다고.


혹시 퇴직을 했다면 지금까지 입고 있던 외투에 대한 미련도, 타인의 시선에 대한 걱정도 다 버리라고 말하고 싶다. 스스로 그어 놓은 황색 선을 넘어보고, 스스로 나를 가두기 위해 쳐놓았던 가시철조망을 걷어내고, 봉인해 둔 비밀 상자의 뚜껑을 열어 잠자고 있는 꿈을 깨워보라고 말하고 싶다.


오롯이 나로 살면서 나는 비로소 '개인적이지 않은 통찰은 존재하지 않는다'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지금 나는 내 비밀 상자에서 무엇을 꺼낼 것인지, 무지개의 여덟 번째 색깔을 어떤 색으로 칠할지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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