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윤구 Sep 26. 2022

기적을 꿈꾸며 맨발 걷기 3

- ‘신발’을 벗는다는 것 -

오랜만에 구두를 신고 집을 나섰다. 퇴직 후에는 결혼식 또는 장례식같이 특별한 경우에나 구두를 신는데, 오늘은 격식을 갖춰야 하는 모임이 있어 어쩔 수 없이 구두를 신었다. 문밖에 나서자마자 이내 답답해진 발가락들이 아우성을 쳤다.     

 

유전자 깊숙이 새겨진 먼 원시 조상의 삶의 방식을 좇아 대지 위를 활개 치며 걷던 발가락들이 오라에 묶인 채 어둡고 깊은 동굴 속에 갇힌 듯 볼 좁은 구두 속에서 어쩔 줄을 몰라 요동을 하였다.


저녁 무렵 집에 돌아오자마자 구두와 양말을 벗어 종일 묶여 있던 녀석들을 풀어준 다음 곧바로 찬물을 끼얹어주었다. 그만해도 살만해지기는 했지만, 온종일 시달린 녀석들의 생기를 되찾아주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어둑해진 저녁 7시, 숲길을 향해 집을 나섰다.     


신발을 벗고 대지의 살갗에 발을 대는 순간, 종일 쌓인 피로도 갑갑함도 물 위에 떨어지는 눈송이처럼 일순간에 사그라들었다. 며칠을 주리다가 성찬(盛饌)을 받은 듯, 애를 끓이던 오랜 짝사랑이 환하게 웃어주기라도 한 듯 눈 깜짝할 새 발은 물론 온몸이 행복감으로 충만해졌다.      


이 무한한 해방감이란!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지는 대지의 기운이란!

순식간에 가을 하늘처럼 환하고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청량한 풀벌레들의 합창을 들으며 한참을 걸었다.     


언제부터인가 맨발로 걷는 것이 구두는 말할 것도 없고, 등산화나 운동화를 신고 걷는 것보다 편해졌다.

맨발로 걸을 때면 가장 내밀한 신체 부위 중 하나인 발을 드러내 놓고도 부끄럼 없이 해방감과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고, 그런 느낌들에 중독되면서부터 볼 좁은 구두처럼 나를 옥죄던 타인의 이목과 평판으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졌다. 발바닥이 두꺼워짐에 따라 박엽지(博葉紙)처럼 얇던 낯도 두툼해지고 질겨진 것이다.

    

그렇게 맨발 걷기는 가장 중요한 일상 중의 하나가 되었고, 나는 매일 대지와 접속하여 대지의 체온과 맥박을 느끼고 있다. 비 내린 후의 진창길과 우락부락 이어진 너덜길과 가파른 비탈길을 맨발로 걷는 것을 두려움 없이 즐길 수 있게 되면서 가끔 쥐가 나고 뒤틀리던 정신의 다리도 조금씩 풀려가고 있음을 체험하고 있다.     


아울러 내가 체험하고 느낀 것들을 나눠보겠다며 시작한 맨발 걷기 동호회의 회원 수도 가파르게 늘어 불과 두 달 만에 100명을 넘어섰다. 작은 동아리 정도를 그렸던 내게는 꿈에도 그려본 적이 없는 커다란 기적이다.      


불치의 마군(魔軍)에 사로잡힌 이부터 회광반조(回光返照)를 꿈꾸는 노년에 이르기까지 저마다의 곡절을 가진 한 명 한 명이 모여서 어느새 함께 기대어도 쓰러지지 않고 넉넉히 받쳐줄 수 있는 큰 나무로 성장을 한 것이다. 매주 토요일이면 이들과 함께 숲길을 걷고 이야기를 나눈다.

     

함께 걸으면서 많은 이들이 크고 작은 변화를 경험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변화를 경험한 사람은 변화와 기적이 간절한 또 다른 이들을 같은 길로 이끌어 온다. 그렇게 기적과도 같은 일들이 내 앞에서 일어나고 있다.     


나는 숲길 초입의 커다란 참나무 아래 둥그렇게 벗어놓은 각양각색의 신발들을 볼 때마다 신발을 벗어놓은 이들의 간절함과 굳은 의지를 느끼곤 한다. 내가 꿈꾸어온 기적을 그네들도 똑같이 꿈꾸고 있음을 본다.


오늘 어두운 숲길을 맨발로 걸으면서 문득 잊고 있었던 책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몇 년 전 『몸의 심리학』(이병창 지음)이란 책에서 본 '신발'을 벗는 것의 의미를 설명한 구절이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신을 만났을 때 ”네가 선 땅은 거룩한 곳이다. 그러니 네 신발을 벗으라“(출애굽기 3장 5절)는 음성을 듣는다. 모세의 삶은 신발을 벗기 전과 후가 완전히 달라졌다. 처가살이하며 광야에서 장인의 양을 치던 목자가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하는 지도자가 된 것이다. 인간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상징인 ‘신발’을 벗어던지고 도약해야 한다. 그 신발을 벗을 때라야 나에게 주어진 길을 가게 된다.”라는 구절이다.     ]


지은이처럼 신발을 벗는 것에 이토록 심오한 의미를 부여할 만큼의 사색이나 성찰을 해 본 적은 없지만, 모세가 신발을 벗은 것과 나와 내가 만난 맨발로 걷는 사람들의 그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발’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신발을 벗고 대지 위를 걷는 것 또한 모세의 그것처럼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과 다른 삶을 선택하고 실천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신발을 벗기 전과 후의 모세의 삶이 크게 달라졌듯 나의 삶, 그리고 맨발로 걷는 많은 사람의 삶 또한 신발을 벗음으로써 육체와 정신의 고통 상태에서 벗어나 기적적으로 고양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토요일 아침이면 매일 기적을 꿈꾸고 삶의 변화를 소망하는 이들을 만난다.

그들에게 모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신발을 벗고 즐거이 맨발의 고통을 견디어 마침내 삶을 변화시킨 내가 만난 여러 모세들의 이야기들을 나눌 것이다. 기적은 신기루가 아니라 신발을 벗고 걷기 시작한 누구나 이룰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것임을 이야기해줄 생각이다.  


오늘 하루, 오랜만에 벗었던 신발을 다시 신고 숨구멍조차 없는 길을 걸었다. 그 길을 걸으면서 무엇이 나를 자유롭게 하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어두운 밤길을 신발을 벗고 걸었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자유로워지고 편안해졌다. 그렇게 나는 매일 신발을 벗고, 날마다 어제의 나와 작별하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기적을 꿈꾸며 맨발 걷기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