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말했듯
이 때는 한창 레슨을 많이 하던 시기였다.
나름 굉장히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할 만큼
돈을 악착같이 모았다.
돈이 아까워서 레슨을 다닐 때면 외식이나 쇼핑은 물론이거니와
밖에서 커피 한 잔 사 먹지 않았다.
난 20대 후반까지 면허증이 없었기에
언제나 지하철이며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늦을까 노심초사하며 뛰어다니는 게 일이었다. 들어오는 대로 수업을 받다 보니 ㅇㅇ동 꼭대기에서 버스정류장까지 15분 동안 내리 뛰어가고 ㅇㅇ동까지 1시간 걸려 가곤 했었다.
가끔 일찍 도착하는 날이면 아파트 근처를 정처 없이 서성이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이 놀랄까 아파트 계단에 숨죽이고 앉아있다가 시간 맞추어 들어갔다.
영하 10도 이상 떨어지는 추운 겨울날에는 옷을 몇 겹씩 입고 어그부츠를 신고 롱패딩을 입고 하루종일 돌아다녔다. 집에 온 뒤 몇 시간을 이불속에 있어도 마치 다리 속에 뼈가 아닌 하얀 얼음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시렸다.
운전면허를 따고 친브라더가 타던 차를 물려받은 후에는 훨씬 편해졌지만, 이 동, 저 동을 메뚜기처럼 뛰어다니고
분 단위로 움직이는 것은 같았다.
언제 한 번은
수업 이동 중에 생리를 시작했는데
생리대를 살 시간조차 없어서
대충 학생 집에서
휴지를 대고 저녁 9시 반까지 수업을 했다.
수업 시작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건 기본이라 생각했고
수업에도 개인 카톡, 연락 등 핸드폰도 일절 보지 않았다.
굉장히 성실하게 임했다.
내 일이 좋았고
또 그토록 절박했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학교를 도전해 볼까?
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집 바로 앞에 오래된 상가가 있었는데, 1층 부동산이 있던 곳이 자리를 이전해서 비어있었다. 보증금 1천만 원에 월 30만 원을 내고 그 공간을 빌렸다. 90만 원짜리 저렴한 중고 업라이트 피아노를 사서 넣고 연습실로 꾸몄다. 낮에는 내내 레슨을 하고 저녁 8~9시부터 연습실로 가서 새벽까지 연습을 했다.
낮에는 돈을 벌고
밤에는 연습을 했다.
긴 이야기를 축약하자면
제일 높은 곳들을 썼고
떨어졌다.
아,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 보다
란 생각이 들었다.
피아노는 단언 내 인생의 보물 1순위다.
피아노가 없으면 절대 살 수 없다.
연습을 하면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언제나 감동하고 깨달음을 얻는다.
스스로 치유되는 기분이랄까?
게다가
지금도 어디 외딴 여행지에 가면 공항이나 거리나 카페에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가 있는지 꼭 찾아본다.
(아마 피아노 치시는 분들이라면 다들 공감하실 듯)
나에게 피아노는
최강의 힐러이자
유레카를 외치게 하는 진리, 그 자체이며 때론
두근거리는 설렘을 주는 사랑하는 대상이다.
그러나
전공자로서 피아노를 생각하면 언제 실수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감과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란 평가와 재단, 낙인으로 인한 두려운 마음이 거듭 씨앗을 뿌려대며 멋대로 자라났다.
좋아하는 대가의 연주 영상은 미친 듯이 찾아보다가도
누군가 피아노를 치는 것을 보면
자동적으로 비교를 하게 되서인지
마냥 피하고 싶기도 했다.
지금도 명피아니스트의 연주가 아닌
피아노 영상은 자주 찾아보지는 않는다.
어떤 전공자분이
대가의 연주는 감히 평가를 할 수 없는 마스터피스니 제외하고
잘 치는 사람 보면 질투가 나고
못 치는 사람 보면 불쾌한 우월감만 나서
피아노 연주가 보기가 싫다는 말을 하셨는데
그 말을 대부분의 전공생뿐 아닌 취미생분들 까지 공감했다.
나 역시 피아노 영상을 보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내 성인제자분은
잘 치건 못 치건 대부분의 한국 사람의 비교군은 언제나
조성진이라고 이야기하셨다.
그렇다.
음악, 특히 악기연주는 꼭대기의 별 극 소수만 빛나니까.
피아노는 나에게 환희의 찬란한 빛이자
동시에 깊고 캄캄한 암흑이었다.
나는 자기 발전을 명목으로
주기적으로 교보문고에서
음악 서적을 구입하곤 했는데,
우연히 음악미학에 관한 책을 사게 됐다.
신세계였다.
음악에는
그저 어떻게 하면 연주를 잘할 수 있을까
작곡가 의도는 뭐지
해석은 어찌하지
이런 단편적인 생각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작품 하나만 가지고도
이게 왜 가치 있는지 이런 것도 음악인지 맞다면 왜고 아니라면 왜인지.
이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는지 아닌지 논거는 뭔지
작곡가의 의도는 중요한지 아닌지
의도가 곡이나 연주에 나타나는지 아닌지
나타난다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나타내는 게 좋은 연주인지 아닌지
작곡가와 작품은 별개인지 예술작품은 뭐고 키치는 뭔지
어떤 예술은 훌륭하고 어떤 예술은 아닌 이유가 뭔지
왜 특정 작곡가들만 연주되고 있는지
왜 현대음악은 외면을 받는지 그럼에도 왜 지속되는지 등등
(그냥 떠오르는 대로 적어봤습니다)
이렇듯 꼬리에 꼬리를 무는 철학적 생각이 눈앞에 펼쳐졌다.
음악으로도 이런 생각들을 할 수가 있다니!
글쓴이 란을 봤다.
'음악학'이란 학문을 전공하는 선생님들이
공동 집필하신 책이었다.
아-
이런 논의를 배울 수 있다면
나의 음악적 깊이는 얼마나 심오하고 광활해질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런 정보도 모른 채로
저자인 교수님께 용감하게 메일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