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하다, 무료하다, 멍하다, 껍데기만 남은 느낌이다.
파나마 권태기가 다시 찾아오고 있다.
파나마는 정말 할 거 없고 볼 거 없고 아무것도 없는 나라다. 심지어 집 앞에 마땅히 산책할 곳조차 없다. 차 끌고 15분 나가야 한다.
파나마살이 1에서 소개했듯 시티는 1박 2일이면 충분히 다 본다. 그런 나라에 2년 넘게 있으니..
나는 일 벌이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각종 모임 생성기- 영어 스터디 모임, 독서 모임, 음악 취미생 모임, 음악전공자 모임, 나아가 소개팅 사업까지 하려고 했다.
토요일만 쉬며 주 6일 동안 일을 몇 년간 했고 일반대학원 석사를 두 개째 했다.
음악 프로필을 쌓기 위해 꾸준히 콩쿠르 준비며 연주회 및 마스터클래스 등 참여하고 집 앞 상가를 빌려 연습실로 만들어 새벽까지 연습하곤 했다.
잠깐 휴학을 했을 때는 홈베이킹 공장을 돌려댔고 저녁에는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세계 정치 논문을 봤다.
결혼할 때도 일, 대학원, 대학원 조교, 혼자 결혼준비(남편은 해외)를 다 했다. 물론 8년간 남편과 연애도 열심히 하고! 어쨌든 자꾸 일 벌이는 게 장점인자 단점인 나였는데-
파나마에 오면서 모든 게 강제로 멈춰졌다. 내 통장 잔고는 더 이상 늘지 않고 대학원은 수료에 머물러있다. 커리어 역시 더 늘어나지 않고 있다. 이게 생각보다 큰 우울감을 준다.
그렇다고 여기 와서 마냥 논 건 아니고 나름 혼자 고군분투했다.
지금까지 곡을 26곡 발매했고 책을 읽고 독서일지를 기록한 것이 어느덧 165권이 되었다. 프랑스에서 자작곡 리사이틀도 가졌고 혹시 모를 박사를 위해 어려운 곡도 연습 중이며 유튜브 음악 영상은 128개를 업로드했다. 운동도 꾸준히 해서 체형을 유지하고 있고 집안일 및 요리는 물론, 강아지 돌보기도 매일 하고 있다.
게다가 가계부도 꼬박꼬박 쓰고 투자도 열심히 한다. 논문은 1/3 썼다.(중단함)
아무런 강제성도 없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환경에서 이 정도면 스스로 훌륭하다고 칭찬하고 싶다.
근데도 끝없는 무료함이 밀물처럼 다가온다.
특히 주말에는 더 심해진다. 요새 토요일 오후에 아이 수업이 하나 있어서 조금은 덜하지만, 그전에는 토요일 오후 남편이 골프를 다녀와 피곤해서 자는 동안 홀로 우두커니 창밖 하늘을 보고 있으면 마치 끝없는 시간의 방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특히 저녁엔 시간이 잘 가는데 애매한 낮 2시부터 5시까지는 집중도 잘 안되고 뭔가 덧없게 느껴진달까. 공기와 온도, 분위기와 색깔이 흐린 베이지색이다.
요새는 일어나면 아침에 트리에 불을 켜고 캐럴을 튼 다음 집안일을 시작한다. 개운하고 좋은 느낌과 더불어 어딘가 알 수 없는 지루함이 항상 공존해 있다.
최근에 <불행중독>이란 책을 봤다.
책을 읽기 전부터 나는 내가 즐거움에 대한 혐오를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굉장히 좋고 행복할 때 스스로 꼭 불행의 먹구름을 가져와서 끼얹는다는 걸.
그래서 이것도 그런 건가? 이것도 불행중독의 일부인가? 란 생각이 들곤 한다. 정확히 나는 불안증독인가 싶기도.
한국에서의 삶이 행복했냐?라고 하면 그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남편이 말하길, 그때 한국애서 내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해서 빨리 해외로 가고 싶어 했단다. 그렇지.. 오기직전까지 불안함이 엄청나게 컸지.
처음에는 통장에 찍히는 숫자들이 쌓여갈 때, 뭔가 이뤄내서 프로필이 쌓여갈 때 큰 기쁨을 느꼈는데 그게 사라져서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지금 하는 수업료는 남편 통장으로 입금되기도 하고(입금액도 적을뿐더러) 한국에서의 음악적 커리어가 멈춰진 상태니 말이다.
그런데 이건 표면적 이유인 것 같다.
내 안의 불안 머신이 작동하면서 편안함을 무료함으로 변환시키는 것 같기도.
지금은 답을 모르지만 나는 안다. 언젠간 답을 찾아낼 것이라는 걸. 지금은 아니어도 나중에는 반드시 깨달을 것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