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남색] 할아버지의 작은 박물관.

"할부지, 오늘도 밭에 가?"

by 무지개호랑이

최근에 할아버지께서 뇌경색으로 병원에 가셨다. 가족 모두가 잠깐 흔들렸다. 많은 검사를 마친 할아버지는 수술이 아닌 시술을 하기로 했다. 다행히 시술을 무사히 마쳤다. 할아버지가 병원에 계시는 동안 가족 모두는 할아버지 방을 리모델링하기로 했다.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 방 철거를, 큰이모네와 작은이모네는 밥을, 막내 삼촌네는 인테리어를 맡아서 진행했다.


철거는 하는 과정에서 서랍 깊숙이 숨겨놓은 비상금을 발견했다. 긴 수첩 사이에 고이 펴서 포개어 놓은 5만 원과 만원 지폐들이 왜인지 모르겠으나 귀엽게만 느껴졌다. 돈 냄새 잘 맡는 할머니에게 들키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서랍 정리가 끝나고 옷장을 열었다. 이번에는 남색 바지 사이에 숨겨진 상자를 발견했다. 가벼운 먼지를 털고 열었다. 무언가 빼곡히 담겨 있었다. 확인하기 위해 하나하나 꺼냈다. 나의 초등학교 졸업패, 엄마의 고등학교 졸업 사진, 할아버지의 전역증 그리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찍었던 수많은 사진들. 꺼내어 펼쳐보니 역사박물관의 모습처럼 가족 박물관이 되었다.


나는 어릴 적 내 사진을 보고 과거를 회상에 잠겼다. 어릴 적 부모님의 맞벌이로 할머니, 할아버지와 유치원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함께 지냈었다. 할머니를 따라 마을 곳곳을 뛰어다녔고 할아버지를 따라 밭을 뛰어다녔었다. 마을에 사는 또래 아이들과 산에서 다람쥐를 잡겠다며 나무에도 올랐었다. 걱정 없이, 겁 없이 놀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엄마도 자신의 젊었던 사진을 보며 회상에 잠긴 듯했다. 자연스럽게 쉬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해가 거의 질 무렵에 철거가 끝이 났다. 흙먼지 쌓인 한라산 담배도 버렸다. 담뱃재에 쌓인 라이터도 버렸다. 방구석에 숨겨놓은 비싼 술도 버렸다. 구멍 나고 해진 남색 옷들도 버렸다. 여태까지 추억을 버리지 않고 지켜주신 고마운 마음만 남겨 놓았다.


이제는 건강한 할아버지만을 기다리고 있다. 할머니가, 가족 모두의 고마움을 담은 방이.

내 돌잔치 사진.


keyword
작가의 이전글[빨강] 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