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 만든 어린 날의 수치심에 대한 기록
식은 통닭은 맛이 없었다. 기름이 끈적하게 응고되어 푸석해진 겉껍질 위로 번들거렸다. 중학교 1학년 소풍 날, 내 가난은 그 통닭이 담긴 봉투에서 배어 나오는 눅진한 기름 냄새처럼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날의 허기는 통닭으로 채워지지 않았다. 채워지지 않은 것은 뱃속이 아니라 뼈아픈 수치심이었다.
아버지는 자주 집을 비우셨다. 한 계절이 지나야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그 빈자리는 어머니가 감당하셨다. 어머니의 새벽은 일터로, 밤은 지친 걸음과 네 남매의 빨랫감으로 가득했다. 어머니의 삶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쓸 시간이 없는 하루로 구성되어 있었다.
국민학교 6학년 봄, 스승의 날. 나는 뭔가 해야 했다. 가난한 단칸방에 여섯 식구가 살고 있었음에도, 친구들이 과일 바구니와 고급 화장품 세트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나는 마땅히 해야 할 도리라고 믿었다. 어머니께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어머니는 대답 대신 부엌 구석의 찬장을 열었다. 찬장 끝, 가난한 우리 식구의 반찬값으로 써야 할 쌈짓돈을 넣어 둔 함석통이 열렸다.
어머니는 그 통에서 몇 개의 동전을 골라 내 손에 쥐여주셨다. 동전은 차가웠으나, 그 차가움 안에는 어머니의 체취가 깃들어 있었다. 새벽 공기의 냉기와 땀에 밴 흙먼지 냄새가 뒤섞여.
나는 그 돈에 맞춰 선물을 골라야 했다. 우리 선생님은 매일 아침 커피, 프림, 설탕을 늘 책상 한쪽에 놓여 있던 낡은 흰색 머그잔에 섞어 마셨다. 나는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선생님에게 실질적인 효용이 있는 프림 한 통을 샀다. 그것은 크기가 작고 포장이 미흡한 물건이었다. 선생님께 그것을 내밀던 순간, 내 몸은 이미 작아져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차라리 선물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중학교 1학년, 나는 통닭을 원했다. 가난은 늘 사소한 음식 앞에서 내 존재를 움츠러들게 했다. 점심때 밥을 같이 먹던 친구들은 이번 소풍 때 모두 똑같은 김밥과 사이다 대신 각자 음식을 나누어 가져오자고 했다. 누구는 밥과 상추 쌈을, 누구는 후식으로 먹을 과일을 맡았다. 소풍 준비 목록에서 '통닭 한 마리'를 외쳤을 때, 나는 가난을 감춘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노동력을 담보로 허세를 부린 셈이었다.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는 어둠이 깔린 마당 우물가에서 밀린 빨래를 하고 있었다. 찬물과 비누 거품 섞인 물이 돌 바닥을 따라 흘렀고, 나는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통닭 이야기를 꺼냈다. 어머니는 차가운 물에 잠긴 젖은 빨랫감을 쥐었다 놓으며, 젖은 행주처럼 무거운 목소리를 냈다. "뭔 소리고, 통닭을 와. 말이 되나 그기."
나는 어머니에게 '안 된다'는 단호한 대답을 듣기 싫어 찬물에 젖은 어머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이는 애원보다는 강요에 가까웠다. 가난 때문에 생긴 분노와 창피함을 나는 어머니에게 위협처럼 밀어붙였다. 나는 짜증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치미는 수치심을 표출했다.
어머니는 대답 없이 젖은 손을 닦고 부엌으로 향했다. 나는 그 등을 따라갔다. 어머니는 찬장 끝 함석통을 열어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천 원짜리 몇 장을 내 손에 쥐여주셨다. 그 돈은 어머니의 다음 날 노동이었다. 나는 그 값비싼 노동을 쥐고 감사 대신 승리감을 느꼈다. 이기심이 만든 승리였다.
동네 통닭집에서 기름 종이에 싼 봉투를 들고 집에 들어왔을 때, 동생들의 아쉬운 눈빛과 그 옆에서 무언가를 말하려다 접은 듯한 어머니의 눈빛. 나는 봉투를 방구석에 두고 승리를 지키듯 잠들었다.
소풍 날 점심시간. 친구들이 도시락을 풀었다. 내 통닭 봉투를 열자, 차갑게 식은 기름 냄새가 거북하게 올라왔다. 포장지를 걷어낸 닭다리 조각은 광택을 잃은 짙은 갈색이었다. 한 입 베어 물었다. 푸석하고 눅진한 겉껍질은 이와 혀 사이에서 겉돌았고, 응고된 기름은 입안에서 녹지 않고 모래알처럼 거칠게 느껴졌다. 육즙은 이미 빠져나가 살코기는 퍽퍽했으며, 염지되지 않은 닭 특유의 밍밍하고 비린 맛이 났다. 내 앞에 놓인 통닭을 집어 씹던 친구들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표정으로 서로의 눈을 마주쳤다. 그들은 예의상 한두 번 더 씹다가 내려놓았다. 나는 말없이 포장지를 덮었다. 식은 기름이 종이 봉투 아래에 창피함의 얼룩처럼 번져 있었다.
통닭의 맛은 사라졌지만, 그날 밤 어머니의 짧은 대답, 빨래를 널다 멈추던 어깨의 떨림, 돌아서던 힘겨워 보이던 등은 영원히 식지 않는 기억의 질감으로 남았다.
어머니는 당신의 희생을 굳이 말로 가르치려 하지 않으셨다. 필요하다는 자식의 이기적인 요구 앞에서, 그저 몸을 먼저 움직이셨다. 그 행동은 '사랑한다'는 말보다 훨씬 무거워, 50대가 된 지금도 내 삶의 모든 선택 앞에서 나를 짓누르는 침묵의 부채이다. 나는 지금도 종종,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해지지 않는 곳에 있다는 서늘한 진실을 식은 통닭의 냄새로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