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벌의 옷, 한 권의 책

평범한 일상으로 준비하는 마지막 길

by 박계장

20여 년 전, 할머니의 임종이 다가왔다는 소식을 듣고 중환자실로 달려갔다. 평생 험한 일을 하셔서 어지간한 남자보다도 크고 거친 손을 잡았을 때, 할머니는 내 손을 힘주어 맞잡으셨다. 그 순간 나는 할머니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눈빛에는 분명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인공호흡기가 입과 코를 막고 있었다. 회복이 어렵다는 사실은 분명했는데, 왜 기계가 마지막 말조차 가로막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언젠가 내가 더 이상 스스로 숨을 쉴 수 없는 날이 온다면, 인공호흡기에 의지하며 삶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고.


최근 존경하던 선배가 너무 이른 나이에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며 나의 마지막을 생각하게 되었다. 내 삶이 끝나는 날에는 생전에 자주 입던 감색 정장을 입고 싶다. 출근길마다 함께했던 그 옷은 평범한 아침들의 기억을 불러올 것이다. 굳이 낯설고 무거운 수의를 마련할 필요는 없다. 익숙한 옷 한 벌이면 충분하다. 만약 마지막까지 곁에 두던 책이 있다면, 그 책을 내 손에 쥐어 주었으면 좋겠다. 가보지 못한 길을 가다 어느 나무 그늘에서 다 읽지 못한 책을 마저 읽고 싶을지 모르니까.


관은 가장 저렴한 것이어도 괜찮다. 고급 목재일 필요는 전혀 없다. 화장이 끝난 뒤 남은 재는 내가 여생을 보냈던 시골 땅 한 귀퉁이 감나무 밑에 묻어 주면 된다. 봄이면 쫄병이 딱은 고참의 군화 마냥 반짝이는 연둣빛 잎이 피어나고, 가을이면 주황빛 감이 주렁주렁 매달린다. 햇살과 흙냄새가 스며드는 그 자리라면, 내가 흙으로 돌아가기에도 더없이 좋은 곳일 것이다.


제사는 따로 지내지 않아도 괜찮다. 나조차도 살아 있는 동안 그런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죽은 사람을 위한 의식보다는 살아 있는 이들의 삶이 더 소중하다. 그러니 내 이름으로 무언가를 지키려 애쓰거나, 마음의 짐을 지지 않아도 된다. 해마다 내가 떠난 즈음, 가족들이 모여 밥을 같이 먹고 서로 안부를 묻는 정도면 충분하다. 그 시간에 웃음이 있고, 따뜻한 말이 오간다면, 그게 바로 내가 바라는 것이다.


돌아보면 내 삶은 완벽하지 않았다. 해야 할 말을 놓친 적도 있었고, 돌아서고 나서야 잘못된 선택임을 깨달은 일도 있었다. 아버지와는 온전히 화해하지 못했고 아내에게는 용서도 구하지 못했다. 아이들에게는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전하지 못했다. 지키고 싶던 관계를 놓친 날도 있었고, 잘해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던 순간도 많았다.


그렇다고 모든 걸 포기하지는 않았다. 나는 누군가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애썼고, 맡은 일은 끝까지 책임지려 노력했다. 업무를 하면서는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후배들의 어려움을 나몰라라 하는 상사는 아니었다고 자부한다. 포기하고 싶을 때 한 걸음 더 다가가려 했고, 남을 탓하기보다는 나의 책음을 돌아보려 했다.


서툴렀지만 진심이었고, 부족했지만 최선을 다한 날들이었다. 그 평범한 노력들이 누군가에게 한 줌의 온기가 되었기를, 내가 걸어온 길이 헛되지 않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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