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거운 자유 앞에서

퇴직이 추방이 되지 않도록

by 박계장

영화 〈쇼생크 탈출〉 속의 노인 브룩스는 내 기억에 가장 깊이 남아 있는 인물이다. 그는 교도소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며 까치를 돌보던, 환한 미소의 온화한 노인이었다. 하지만 무거운 죄를 짓고 반세기를 감옥에서 보낸 죄수이기도 했다. 관객의 마음에 남는 것은 그의 죄가 아니라, 출소 후 낯선 거리를 홀로 배회하던 초라한 뒷모습이다.


마차가 다니던 길 위로는 자동차가 줄지어 달렸고, 전화선과 전봇대는 얽히듯 늘어서 있었다. 세월이 바꿔 놓은 풍경 속에서 그는 걸음을 떼지 못했다. 감옥의 삶은 닫혀 있었지만 동시에 질서가 있었다. 정해진 시각에 식판을 받았고, 맡은 일이 있었으며, 이름을 불러 주는 동료도 있었다. 그러나 세상 밖에서는 모든 선택을 홀로 감당해야 했다. 그를 기다리는 사람도, 그의 이름을 불러 주는 목소리도 없었다. 결국 그는 낯선 방의 천장에 밧줄을 걸었다. 자유는 그에게 해방이 아니라 추방이었다.


그 장면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내 모습이 겹쳐진다. 33년 동안 공직에 몸담아 살아왔고, 이제 퇴직도 멀지 않았다. 매일 아침 휴대전화 알람 소리에 몸을 일으켜 출근했다. 하루하루는 조금씩 달라 보였지만, 돌아보면 한 달마다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었고, 반기와 1년 단위로 반복되는 흐름은 늘 같은 틀 안에 있었다. 월간 업무보고, 분기 실적 제출, 결산보고, 예산 편성과 심의, 내년도 업무계획 보고, 행정사무감사까지…. 모든 것은 정해진 절차와 규정 속에서 흘러갔다.


이런 일상이 답답하다며 중도에 일터를 떠난 동료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오히려 이런 틀 안에서 살아가는 게 편했다. 꼭 맞는 옷을 입은 듯 편했고, 규칙적인 이러한 생활이 내게 안정감을 주었다. 나에게 딱 맞는 일이었다. 공직이란 건.


초임 시절, 보고서는 늘 시험 같았다. 몇 줄 되지 않는 글을 붙잡고 하루 종일 고쳤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떨리는 손으로 상급자의 책상 위에 올려놓곤 했다. 의회에서 내 업무와 관련한 의원들의 질의가 예고되면 온갖 상황을 고려한 시나리오를 준비해야 했다.


밤에는 접객업소 영업시간 위반, 퇴폐영업 단속을 나갔다. 술기운에 언성이 높아지는 손님, 영업을 방해한다며 거칠게 항의하는 업주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것도 일이었다. 그렇게 하루가 쌓이고 또 쌓여 오늘의 내가 되었다.


몇 해가 지나면 나를 지켜주던 울타리도 사라질 것이다. 더 이상 알람이 나를 깨우지 않을 것이고, 행정사무감사와 예산안 심의, 업무보고가 나를 조이지도 않을 것이다. 길들여진 질서가 무너지는 순간, 그 자리가 자유일지 공허일지는 알 수 없다. 브룩스가 낯선 세상에 내던져졌듯, 나 또한 홀로 서야 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서늘해진다.


브룩스의 이야기는 한 노인의 비극으로만 남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자유란 그저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된다는 뜻일까, 아니면 스스로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비로소 누릴 수 있는 것일까. 준비 없는 자유는 사람을 해방시키지 않고 오히려 짓누른다.


그 자리에 서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작은 연습이 필요하다. 하루의 일부를 내 의지로 채워 보는 일, 글을 쓰며 스스로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일, 낯선 길을 걸으며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일, 가족과 시간을 나누며 관계를 다시 세우는 일. 조직의 이름표가 없어도 나를 붙들어 줄 뿌리를 길러야 한다.


때때로 불안이 엄습한다. 일터를 나서는 순간, 내가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로 보이진 않을까. 그러나 두려움은 피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마주해야만 극복할 수 있다. 자유는 준비되지 않은 사람을 무너뜨리지만, 준비된 사람에게는 새로운 길이 된다.


나는 퇴직 후의 시간이 텅 빈 공간이 아니라 또 다른 출발이 되기를 바란다. 제도의 울타리에만 안주할 수는 없다. 다가올 자유를 짐처럼 짊어지지 않도록, 스스로 살아낼 힘을 길러야 한다.


브룩스가 밧줄 앞에 멈춰 섰던 자리에 내가 서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내 인생을 바쳐온 공직생활이 끝난 뒤에도 내 삶의 이야기가 이어지기 위해서다. 아직 그날 이후의 모습은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그 자유를 살아낼 용기를 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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