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다리 아저씨

세상을 지탱하는 따뜻한 마음

by 박계장

저녁 식탁에 앉아 TV를 켰다. 화면에는 유튜브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필리핀에서 현지 여성과 결혼하여 살고 있는 한국인이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 구독자들의 도움을 모아 집을 고치고 생활용품을 지원하는 내용이었다.


그날의 주인공은 열두 살 소녀였다. 학교가 끝나면 길거리에서 꽃을 팔아 생계를 돕는 다. 그 아이가 사는 집의 벽은 회색 블록 그대로였고, 천정은 합판을 덧대 놓은것 같았다. 환기가 되지 않는 집안의 눅눅한 공기 속 곰팡이 냄새가 화면 밖으로 스며 나오는 듯했다.


집을 고치기 위해 한국의 구독자들이 십시일반 돈을 보냈다. 화면에는 구독자들이 보낸 오천 원, 이만 원, 십만 원, 사십만 원… 후원 금액이 화면을 채웠다. 이후 영상은 새로 고쳐진 집을 보여주었다. 지붕이 새로 얹히고, 벽에는 페인트가 칠해졌으며, 냉장고와 TV 같은 가전제품도 놓여 있었다. 나는 수저를 내려놓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소득공제도 되지 않을 텐데, 사람들은 왜 이렇게 기꺼이 돈을 보낼까.


재산의 대부분을 사회에 내놓은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 같은 사람들도 있지만, 화면 속 후원자들은 그런 부호들이 아닐 것이다. 그들은 나와 같은 평범한 직장인이거나, 부모, 혹은 학생일 것이다. 이만 원, 십만 원이 그들에게 크지 않은 돈일 수도 있지만, 결코 가벼운 돈이라 할 수는 없다.


나의 기부는 늘 세금 공제 혜택이 따라야 했다. 그것을 내 돈을 아껴 쓰는 현명함이라 여겼지만, 사실은 모든 일을 교환의 눈으로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무언가를 주면 반드시 무언가를 받아야 한다고, 보상이 없는 일은 손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살아오며 내 안의 따뜻함이 조금씩 식어 갔다.


영상 속 소녀의 형편을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후원자들은 그 아이를 만난 적도 없고, 감사 인사를 들은 적도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지갑을 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이. 보답을 바라지도, 이름을 남기려 하지도 않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어야 할 측은지심, 그 마음 하나로 충분했던 것이다.


나는 그런 마음을 언제 잃었을까. 아니, 처음부터 가져본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렵게 살았고, 어른이 되어서도 여유를 가져볼 틈이 없었다. 빠듯한 살림을 꾸리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지금은 도울 형편이 아니라고, 형편이 나아지면 그때 하자고. 하지만 가난은 돈의 부족보다 마음의 여유를 먼저 앗아갔다.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는 사이, 마음의 문이 조금씩 닫혀갔다.


연말이면 거리에 기부 온도를 표시하는 온도계가 세워진다. 그럴 때마다 따뜻하다고 느끼지만, 나는 그저 화면 너머에서 바라보는 사람일 뿐이었다. 모두가 나 같다면, 그 온도계는 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이 아직 살아갈 만한 이유는 나와 다른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보상을 바라지 않고, 이름도 남기지 않은 채 손을 내미는 사람들.


그 영상을 보며 문득 『키다리 아저씨』가 떠올랐다. 편지 한 통으로 이어졌던 고아 소녀와, 자신을 드러내지 않던 후원자. 이름도 얼굴도 모른 채 누군가의 삶을 붙들어 주던 마음. 시대는 달라도 마음의 결은 같았다. 지금의 세상에도 여전히 그런 키다리 아저씨들이 있다. 유튜브의 댓글 속에, 혹은 누군가의 조용한 송금 기록 속에.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두 가지다. 하나는 주고받으며 계산하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 조건 없이 건네는 힘이다. 나는 오랫동안 전자만을 믿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있다. 우리는 주고받으며 살아가지만, 그 사이의 틈에서 작은 따뜻함이 피어난다. 어쩌면 그 틈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자리일지도 모른다.


아마 그들도 한때 누군가에게 조건 없는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그 감사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로 흘러가며, 받은 이가 주는 이가 되고, 그 손길이 이어지는 동안 세상은 아주 조금씩 덜 차가워지고 있었다.


물론 냉소적인 말도 있었다. ‘빈곤을 이용해 조회수를 올린다’는 비난, ‘우리나라에도 도울 사람이 많은데 왜 외국 아이들을 돕느냐’는 지적.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 소녀는 집을 고쳤고,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의 이름 없는 후원자들이 보낸 돈으로였다.


그 소녀가 자라서 그 나라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게 될 때, 그녀는 자신과 가족이 버틸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들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직접 본 적도 없고,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았던 머나먼 나라의 후원자들. 그들에게 감사하며 한국이라는 나라에 따뜻한 마음을 품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작은 돈이 모여 한 사람의 삶을 바꾸고,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의 삶을 바꾸는 선의가 그렇게 이어진다. 측은지심은 풍요의 끝에서 피어나는 마음이 아니라, 가진 것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스스로 깨어나는 마음이다.


누군가의 작은 마음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닿을 때, 세상은 아주 느리게, 그러나 분명히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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