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조용한 발자국

by 박계장

봄날 아침,

사무실 문이 열리고 한 직원이 들어섰다.


잘 다려진 정장,

반짝이는 구두,

단정하게 매어진 넥타이까지.


보건의 날 행사 지원이 있는 날이었고,

모두 알고 있었지만,


요즘처럼 편안한 복장이 익숙한 사무실 분위기 속에서

그 단정한 차림은 오히려 낯설게 다가왔다.


잠시,

사무실 공기가 달라졌다.


늘 운동화에 재킷 차림이던 그가

한껏 차려입고 들어서자


사람들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와, 양복 입으니까 분위기 확 바뀌네.”

“들어설 때 국장님 오신 줄 알았어.”


웃음이 돌고,

짧은 농담이 오갔다.


그 순간,

잊고 있던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정장이 당연하던 시절.


매일 다림질한 와이셔츠에

윤기 나는 구두를 신고 출근하던 때.


그리고

그 구두를 조심스레 닦아주던

한 사람의 얼굴이.


키가 작고,

어깨가 안으로 조금 굽은 체구.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간 듯한 그 웃음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불편해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음 한켠이 조용히 움직이는 묘한 울림을 주는 얼굴이었다.


그는 시청을 돌며

구두를 수거하고 닦아주는 일을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면

항상 입구에서 한 박자 쉬어 가듯 멈춘 뒤


발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언제나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 조심스러웠고,


구두를 들고 나갈 때도,

다시 가져다놓을 때도


필요한 말이 있어도

속삭이듯 조심스럽게 내뱉곤 했다.


자신의 존재를 지우려는 사람처럼,

그 어떤 동작도 소란스럽지 않았다.


그 침묵은,

오히려 많은 것을 전하고 있었다.


그 시절,

공직자의 복장은 하나의 암묵적인 규율이었다.


남색이나 검정 양복,

희끗한 흰 와이셔츠,

잘 닦인 구두.


넥타이 매무새를 슬쩍 확인하며

서로를 챙기던 기억.


사무실을 채운 키보드 소리,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스며들던

구두닦이의 조용한 발소리.


그는 매일 두 번,

오전과 오후


정해진 시간에 어김없이 우리 곁을 찾았다.


하지만,

누구도 먼저 말을 걸지는 않았다.


때로는 남은 간식을 건넸고,

그는 눈을 피하며


과장된 듯한 웃음을 지으며

작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나는 그의 조심스러움을

그저 성격 탓이라 여겼다.


말수가 적고 낯을 가리는 사람.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사업소로 전출되었다가


몇 해 뒤 다시 시청으로 돌아왔다.


익숙한 책상,

낡은 캐비닛,

변하지 않은 풍경.


그 안에

그의 모습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조금 더 말라 있었고,

웃음은 여전했다.


그는 나를 기억했고,

나도 그를 금세 알아보았다.


“오랜만입니다.”


내 인사에

그는 고개를 숙이며 익숙한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가슴 한쪽이 묘하게 시려왔다.


하지만,

직장 문화가 변하면서


정장을 입는 날도 줄어들고

운동화와 캐주얼 슈즈가 일상이 되었다.


자연히

그를 만날 일도 줄어들었다.


그는 점점

내 시야 밖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어느 날,

내부 게시판에서

그를 추도하는 글을 보았다.


그는 지난 겨울,

홀로 지내던 방에서


술에 취한 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사인은, 동사.

장례식도 없었다고 했다.


그를 찾는 이도,

기억해줄 사람도 없었다는 말에


숨이 막혔다.


그가 떠났다는 사실보다,

그의 부재를 오랫동안 눈치채지 못했던

내 무심함이 더 아프게 다가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


그는 고아원에서 자랐고,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사회로 나와

홀로 살아왔다고 했다.


결혼도, 가족도 없이


오롯이 구두닦는 일과

고요한 밤의 술 한 잔으로

세월을 견뎌냈다고.


그는 말이 없었고,

친구도 드물었다.


낮에는 묵묵히 구두를 닦고,

밤이면 술로 스스로를 달랬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 그는,

그렇게 조용한 고립 속에서

살아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사실.


그는 나보다

열 살 이상 많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를

줄곧 동생쯤으로 생각했고


무심코 반말을 하기도 했었다.


그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가 일하던 컨테이너 박스는

어느 날 사라졌다.


철거된 시점조차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 공간은 이제

기억의 한쪽 구석,


희미한 잔상으로만 남아 있다.


그의 손길,

조심스러운 걸음,

미소 가득한 “고맙습니다.”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나는

뒤늦게야 그를 기억하려 애쓴다.


우리는 종종

사람을 ‘존재’가 아닌 ‘역할’로 본다.


구두를 닦는 사람,

바닥을 청소하는 사람,

문을 지키는 사람.


그들이 없으면 불편하지만,

있을 땐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다

그들의 빈자리를 마주한 어느 날,


우리는 비로소

그들이 일상에 스며 있던 깊이를 깨닫는다.


그는 말없이 다가와,

말없이 떠났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가 남긴

조용한 발자국은


내 마음 어딘가에

깊게 남아 있다.


나는 이제,

스쳐 지나는 얼굴 하나에도

마음을 기울이고 싶다.


이름을 묻고,

눈을 맞추고,

작은 인사라도 건네며 살아가고 싶다.


누군가의 하루에

따뜻한 흔적 하나쯤 남길 수 있기를 바라며.


그는 사라졌지만,

그의 손은

어쩌면 우리 마음속 무심함의 먼지를 닦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걸음은 조용했지만,

여운은 깊었다.


창밖으로

바람이 분다.


벚꽃잎이

흩날린다.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나는 오늘도

귀를 기울인다.


누군가의 발걸음,

그 조심스러운 걸음,


어딘가 불안했던 웃음 하나까지—


그 모든 것이

지금도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인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언젠가 나도

누군가의

조용한 기억이 될 것이라는 것을.



keyword
이전 04화낯선 감정의 깨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