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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지에 싸인 겨울

by 박계장

해가 지고 골목에 어둠이 내릴 무렵, 용호동 하늘은 서서히 회색으로 물들어 갔다. 시린 겨울바람은 좁은 골목 사이를 파고들어 모퉁이마다 맴돌았다. 그때, 내 손에 쥐어진 동전 몇 개는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열두 살 무렵의 어느 겨울날, 그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돼지비계 좀 사 오너라."

구들장에 누워 계시던 아버지의 말씀에 나는 집을 나섰다. 몇 달 전, 통신선로 설치 작업 중 허리를 다치신 아버지는 집에 머물렀고, 어머니는 매일 아침 통조림 공장에 출근하셨다. 아버지와 내가 세 여동생을 돌보는 일상을 이어갔다. 세 살 아래인 큰 여동생이 집안일을 거들었고, 두 여동생은 동네 아이들과 철없이 잘 놀았다.

용호동은 대연동 동국제강, 범일동 조선방직, 사상 국제고무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동네였다. 우리 집은 일제 강점기에 지은 주인집인 개량한옥 주변에 다닥다닥 붙은 서른 몇 채 단칸방 중 하나였다. 방 한 칸과 부엌, 겨울이면 바깥과 온도 차이가 없는 다락방이 전부였다.


정육점 아저씨는 통장이자 집주인이기도 했다. 그 집에 비계를 사러 가는 길은 언제나 발걸음이 무거웠다. 어린 마음에도 살코기 한 근도 아닌 비계를 사러 간다는 게 창피하게 느껴졌다. 걸음을 멈칫하다가도 '비계 한 덩이면 찌개 맛이 달라진다'는 생각에 다시 속도를 냈다.


정육점 문을 열자 따뜻한 공기와 고기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동전을 내밀며 비계를 달라 하자, 주인아저씨는 말없이 냉장고에서 비계 한 덩이를 꺼냈다. 신문지에 툭 싸서 내민 그것은 내가 낸 동전으로는 살 수 없는 양이었다. 손님이 있든 없든, 아저씨는 언제나 그렇게 넉넉히 주셨다. 그 손길에서 묘한 따뜻함이 느껴졌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길, 신문지에 싸인 비계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어깨 너머 달빛이 내려앉은 골목길, 얼어붙은 땅 위로 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추운 날씨에도 가슴 한켠에는 작은 뿌듯함이 일었다.


집에 도착하니 연탄불로 데운 방 안이 포근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구들장에 누워 계셨고, 막내는 아버지 곁에서 잠들어 있었다. 두 여동생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나가셨고 신문지를 펼쳐 비계를 확인하셨다. 그리고 한해 우리집 반찬인 김치 한포기를 김장독에서 꺼내 썰었다. 냄비에 물을 붓고 연탄불에 올렸다. 특별한 재료 하나 없었지만, 비계와 김치만으로도 찌개는 제 맛을 냈다.


그날 저녁, 우리 가족은 오랜만에 비계 김치찌개라는 특별한 반찬을 나누었다. 퇴근한 어머니도 지친 얼굴에 미소를 되찾았다. 방 하나짜리 좁은 공간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곳이었다.

처음엔 김치를 넉넉히 넣어 끓이고, 김치를 건져 먹은 뒤 국물만 남으면 다음날 다시 김치를 조금 더 넣어 다시 한번 끓였다. 다음날에 먹는 찌개가 전날 보다 깊은 맛을 냈고, 그것은 마치 시간이 더해질수록 짙어지는 가족의 정 같았다.


아버지는 어느 날은 돼지비계가 아닌 잔멸치를 사 오라 하셨다. 500원짜리 동전 하나를 쥐고 시장까지 30분을 걸었다.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멸치는 간장종지 하나 분량이 전부였다. 어물전 아주머니는 "이 돈으로 뭐 살 끼고?" 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적은 양의 멸치를 들고 돌아오자 아버지도 놀라셨다. 그것을 조선간장을 넣고 연탄불에 끓이셨다. 그러나 요리에 서툰 아버지의 손맛은 어딘지 어색했다. 다행히 퇴근한 어머니가 그것을 발견하고는 설탕과 갖은 양념을 더해 맛을 살려내셨다. 그리고는 "멸치가 적어 간이 세 졌는데, 밥에 비벼 먹자"며 웃으셨다.


오늘 점심, 구내식당에서 김치찌개를 먹었다. 붉은 고춧가루 국물 위로 고기 기름이 둥그랗게 떠올랐다. 한 술 뜨는 순간, 잊고 있던 풍경이 아득하게 되살아났다.

지금 먹는 찌개도 맛있지만, 그 시절 찌개는 맛 이상의 것이었다.


여동생들은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났고, 부모님은 연로하시지만 여전히 건강하셔서 다행이다. 가끔 김치찌개 한 그릇을 앞에 두면, 신문지에 싸인 비계를 들고 돌아오던 그 겨울이 떠오른다.

좁은 단칸방, 연탄불의 온기, 신문지에 싸인 비계. 세월이 흘러도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 겨울의 따뜻함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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