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지하철 안은 조용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보거나, 눈을 감은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말을 나누는 사람도 없었고, 모두 각자만의 시간에 잠겨 있는 듯했다. 차창에 비친 내 모습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초점 없이 흐릿한 눈, 굳게 다문 입술, 아직 잠이 덜 깬 피로에 젖은 표정. 우리는 모두 아침의 도시를 관통하는 거대한 기계 속 부품처럼 말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유독 눈에 들어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체격이 매우 컸고, 좌석 하나를 넘어서 두 사람 몫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지나치듯 그 옆을 지나 자리에 앉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기 관리를 못한 걸까... 병적인 비만이네...' 그리고 바로 따라온 것은 나 자신을 향한 죄책감이었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남을 그렇게 판단하지?'
그 생각은 그림자처럼 하루 종일 나를 따라다녔다. 지인과의 모닝 커피를 마실때도, 점심을 먹으며, 서류를 정리하는 동안에도. 왜 나는 순간의 시선으로 타인의 삶 전체를 재단하려 했을까. 체형 하나로 그 사람의 자기 관리 능력을, 건강 상태를, 심지어 인격까지 판단하려 했던 건 아닐까. 그 사람에게는 내가 모르는, 알 수도 없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른다. 갑상선 질환일 수도, 약물 부작용일 수도, 아니면 그저 유전적 체질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가 감당해야 했던 상처와 아픔을 위로받는 방식이 음식이었을지도 모른다.
퇴근 후, 오래된 거울 앞에 섰다. 형광등 불빛 아래 피곤한 얼굴, 굽은 어깨. 나 역시 비만이다. 지하철 안에서 내가 본 그 사람의 모습은, 사실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나는 그 사람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거울에 손을 대었다. 차가웠다. 그 차가움이 내 뺨을 스치는 것 같았다. 나는 내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서로를 재단하게 되었을까.' 어린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 놀이터에서 만난 낯선 아이들도 금세 친구가 되었고, 누구의 겉모습도 그저 그 아이의 일부일 뿐이었다. 내가 먼저 선을 그은 셈이다. 무언가를 구분하고, 나누고, 판단하는 선.
우리는 남을 볼 때는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자신을 볼 때는 비단 천 위에 놓는다. 남의 주름은 금세 눈에 띄지만, 내 주름은 애써 모른 척하거나 별일 아닌 것처럼 넘겨버린다. 매일 거울을 보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많지 않다.
우리는 사과나무에서 열매를 따게 되면 언제나 남의 바구니에 담긴 사과가 더 빨갛고 더 탐스럽게 보인다. 타인의 결점은 그들의 정체성 그 자체인 양 취급하면서, 내 결점은 그저 지나가는 해프닝쯤으로 여긴다. 타인에게는 완벽을 요구하면서도, 나 자신에게는 끝없는 예외와 변명을 허락한다. 이런 불균형이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언제부터 우리는 서로의 가치를 재는 저울의 눈금을 이렇게 다르게 읽기 시작했을까.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해본다. 지하철에서 마주친 누군가의 눈에 나는 어떻게 보였을까. 그도 나를 보며 '왜 저렇게 생겼지?', '저래도 되는 건가?' 같은 생각을 하진 않았을까. 우리는 서로를 쉽게 평가하면서도, 자신이 평가받는 일에는 예민하다. 마치 종이를 자르는 가위처럼, 타인을 향할 때는 날카롭고, 자신을 향할 때는 무디다.
도시의 수많은 익명의 시선들. 출근길에 마주치는 얼굴들, 점심시간에 스쳐 지나가는 표정들, 퇴근길에 어깨를 부딪치는 이들. 그들은 모두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내가 타인을 향해 던지는 그 날카로운 시선들이, 언제든 나에게도 똑같이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자주 잊고 사는가. 우리는 각자 다른 바다를 항해하는 배일지 모르지만, 결국 같은 하늘의 별을 보며 방향을 찾는다.
사실 나도 내 모습을 정확히 알고 있지는 않다. 거울 속 모습은 익숙하지만, 녹음된 내 목소리는 낯설고, 영상으로 본 걸음걸이도 어색하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보는 나는 다를 수 있다.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남을 판단하는 건 마치 흐린 유리창으로 바깥 풍경을 보며 세상이 흐릿하다고 단정 짓는 것과 같다.
가끔 내 목소리가 녹음된 것을 들을 때면 놀란다. '이게 정말 내 목소리인가?' 싶을 정도로 생경하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도 실제 내 모습과는 다르다. 거울은 좌우가 바뀐 이미지를 보여주니까. 그런데도 나는 거울 속 이미지가 '진짜 나'라고 믿는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도 온전히 알지 못하면서, 타인에 대해서는 순간의 인상만으로 전체를 규정하려 든다. 완전하지 못한 조각으로 온전한 그림을 그리려는 무모함.
어제는 버스를 기다리며 길을 천천히 걷는 노인을 보았다. 걸음이 많이 느렸다. 처음엔 '왜 저렇게 천천히 걷지?' 하고 생각했지만, 곧 내 무릎 통증이 떠올랐다. 작년에 장기교육을 받던 시절, 지리산둘레길을 걷다가 무릎에 이상이 생겼다. 그 뒤로는 경사진 길을 오르내릴 때 나이든 분들 말처럼 무릎이 찌걱댄다. 나도 이제 그런 나이가 된 것이다.
그 순간 노인의 느린 걸음이 다르게 보였다. 그것은 더 이상 답답함의 대상이 아니라, 시간이 남긴 흔적, 살아온 날들의 무게였다. 노인의 걸음에 담긴 인내와 고통을 상상했다. 아마도 그도 한때는 빠르게 걸었을 테고, 어쩌면 산을 오르거나 운동장을 내달렸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 모든 여정의 흔적이 그의 무릎에, 걸음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내 불평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인간의 마음은 묘하게도 자신에게는 무한한 이해와 너그러움을, 타인에게는 엄격한 기준과 완벽함을 요구한다. 나의 실수는 '상황' 탓이고, 타인의 실수는 '성격' 탓이라고 단정 짓는다. 내 지각은 '교통 체증' 때문이고, 타인의 지각은 '게으름' 때문이라고 여긴다. 이런 인지적 왜곡이 우리의 일상에 얼마나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지, 마치 물속 깊이 가라앉은 돌처럼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존재한다.
나이가 들면서 이런 일들이 더 자주 눈에 들어온다. 남을 어떻게 보느냐가 결국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준다는 걸 조금씩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시선은 종종 나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마치 강물이 바다로 향하다가 문득 자신의 근원을 기억하는 것처럼.
선배가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우리가 타인에게서 견디기 힘든 단점들은 사실 내 안에 숨겨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의 투영이라고 했다. 비만인 사람을 보며 느꼈던 불편한 감정은 어쩌면 내 자신의 모습에 대한 불만이 밖으로 드러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타인을 통해 종종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특히 인정하기 어려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남을 쉽게 판단하지 않는 것, 그게 내가 바라는 태도다. 그리고 그 시작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거울 속의 나를 외면하지 않고 제대로 보는 것. 그게 먼저여야, 길 위의 타인도 조금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내 안의 완벽하지 못한 부분들을 인정할 때, 타인의 불완전함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결국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내가 보낸 시선은 언젠가 내게 되돌아온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거울 앞에 선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나 자신을 제대로 보고 있는가. 그리고 오늘 내가 바라본 사람은, 정말 그 사람이었을까.
이제 나는 길 위에서 마주치는 타인들에게 조금 더 너그러운 시선을 보내려 한다. 그들의 겉모습 너머에 있는 이야기를 상상해보려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을 판단하기 전에 거울 속의 나를 먼저 돌아보려 한다. 거울은 결코 거짓말하지 않으니까. 다만 우리의 눈이 때로는 보기 싫은 진실을 외면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