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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감정의 깨어남

by 박계장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출근길, 이선희의 '아 옛날이여'가 흘러나왔다. 이어지는 건 나미의 '빙글빙글', 도원경의 '다시 사랑한다면'. 그 노래들은 오래전부터 내 주변에 있었던 익숙한 멜로디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노래가 귓속으로 착착 감기었다.


그 노래들은 원래 특별하지 않았다. 라디오에서, 거리의 상점에서, 어딘가에서 흘러나와 늘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내가 즐겨 듣던 '여진'이나 '박인희', '송창식' 같은 스타일도 아니었고, 누군가와 함께 들었던 특별한 사연이 얽힌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큰맘 먹고 구입한 에어팟 프로 2세대를 끼고, 언제나처럼 출근길을 걷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귀를 지나 뇌의 어딘가를 건드리더니 가슴까지 파고들었다. 내 몸이 먼저 반응했다. 발끝이 리듬을 따라갔고, 목을 까닥이고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이었다. 그게 스스로도 이상했다.


나는 노래에 쉽게 감정이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다. 음악에 눈물을 흘리거나, 가수의 콘서트를 손꼽아 기다리는 일도 없었다. 좋아하는 노래는 있지만, 대부분은 그저 배경음처럼 흘려듣는 정도였다. 그 이상은 없었다. 아니,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 내가, 오늘 아침엔 어깨를 들썩였고, 입으로 멜로디를 따라 불렀다. 지하철 옆자리 승객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딱히 슬프지도 않았고, 누군가가 떠오른 것도 아닌데, 그 노래에 자연스럽게 반응한 나 자신이 낯설었다. 마치 오랜 시간 웅크리고 있던 동물이 문득 기지개를 켜는 것 같은 느낌.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마음이 조금 느슨해졌던 걸까. 아니면, 그동안 눌러뒀던 무언가가 자기도 모르게 밖으로 나온 걸까. 어쩌면 단순히 음악이 좋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이유일 뿐.


사람은 늘 자신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날 문득, 낯선 감정에 휘청이는 순간이 있다. 오늘이 그렇다. 음악이 내 안의 감정을 두드렸다. 그리고 나는, 그 소리에 응답했다. 그건 마치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문을 발견한 것과 같았다.


언젠가 동료 직원이 내게 물었다. "좋아하는 노래가 있으세요?" 나는 잠시 생각해 봤다. 딱히 무슨 노래를 좋아한다고 할 만한 게 없었다.


노래는 새롭지 않았다. 다만 내가 달라졌을 뿐인 것이다. 같은 노래가 달리 들리는 날은, 결국 내가 달라졌다는 신호다. 어쩌면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난 걸지도 모른다.


요즘 나는 너무 조용하다. 기뻐도 티를 내지 않고, 슬퍼도 금세 눌러버린다. 무뎌진 감정은 편리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텅 빈 기분을 남긴다. 그런 날들이 쌓여 간다. 내가 언제부터 감정의 볼륨을 줄여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흘려보내기만 하던 음악이 가슴에 스며들었고, 내게는 없는 줄만 알았던 감정이 깨어났나 보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말라 있던 땅에 비가 내리는 것과 같았다. 처음에는 물이 스며들지 않다가, 조금씩 젖어 들기 시작한다.


크게 요란하지도, 눈물이 나지도 않았지만 내가 여전히 무언가를 '느끼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한 아침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어쩌면 이게 시작일지도 모른다. 내 안의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다는 신호. 무엇으로 이어질지는 아직 모르지만, 오늘의 이 낯선 감정이 어디론가 나를 데려갈 것 같다.


돌아보면, 이런 순간들이 삶을 바꾸는 작은 전환점이 되곤 한다. 별것 아닌 듯 스쳐 지나가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그때부터 무언가가 달라졌다고 깨닫는 그런 순간. 오늘이 그런 날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귓가에 맴도는 그 노래들이 내게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는 것. 그리고 그 파문이 어디까지 퍼져나갈지는, 이제부터 내가 결정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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