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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이라는 위로

by 박계장

아침이면 셋이 커피를 마신다. 매일은 아니지만, 제법 자주 그런다. 나와 친구, 그리고 후배. 시청 인근의 단골 커피숍에서다.


오늘, 평소처럼 셋이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던 중, 후배가 며칠 전, 유튜브에서 본 영상을 이야기했다. 한국에서 임시 보호되던 진돗개가 외국으로 입양되었다가 실종됐다. 놀랍게도 그 개를 돌보았던 임시 보호자가 미국까지 건너가 직접 찾아냈다는 이야기였다.


며칠 동안 이름을 부르며 이리저리 헤매다닌 끝에, 공원에서 개와 마주쳤다. 개는 멈춰 선 채로 그 사람을 오래 바라보다가, 조용히 다가와 앞에 앉았다. 꼬리도 흔들지 않고, 소리도 내지 않은 채로 그저 눈을 마주 보며.


그 얘기를 듣던 맞은편의 친구의 눈가가 젖었다. 애써 웃음 띈 얼굴인데 그의 눈시울이 붉었다.


"요즘은 말이야…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이런 얘기만 들으면 그냥 눈물이 나."


나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 마음을 안다. 나도 가끔 그런 감정을 느낀다. 짧은 장면 하나, 별것 아닌 이야기 하나에 마음이 저릿할 때가 있다.


그가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그러니까.


커피를 마시고 사무실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시청 앞 화단을 지나는데, 친구가 걸음을 멈추었다.


"야, 이 꽃들 진짜 예쁘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여 작은 꽃 한 송이를 손끝으로 살짝 건드렸다. 색색의, 이름 모를 꽃들이 가지런히 심겨 있었다. 팬지 비슷해 보이긴 했지만, 무슨 꽃인지는 모르겠다.


그가 꽃에 손을 대는 모습을 보며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지나치던 것들에 다시 눈이 머물게 된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중년으로 접어들면 남자도 감성적으로 변한다고들 한다. 호르몬 때문이라고도 하고, 신체 리듬이 달라져서 그렇다고도 한다.


가장으로, 직장인으로 감정을 눌러두고 살아온 시간들. 그 시간들이 벽처럼 쌓이다가, 어느 봄날 작은 꽃 하나 앞에서 소리도 없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 오는 것 같다.


친구는 진돗개 한 마리와 비숑 한 마리를 키운다. 9살 된 진돗개는 퇴근하고 집에 가면 현관문이 열리는 순간 앞으로 뛰쳐나와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두 발로 일어서 가슴팍에 안기고, 혀로 얼굴을 핥으며 숨을 헐떡인단다. 온몸으로 반가움을 표현하느라 숨소리까지 달라질 정도라고 했다. 신발도 못 벗게 한다고. 어깨에 얹힌 하루의 피로가 모두 털어내어 지는 순간이라 했다.


그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는 산길의 바위에 진돗개와 걸터앉은 사진이 있다. 빨간 점퍼를 입은 친구 옆에는 하얀 진돗개가 입을 살짝 벌리고 늠름하게 서서 친구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초록이 짙은 산속에 함께 있는 둘의 모습을 통해 그들의 신뢰와 유대가 얼마나 깊은지 누구라도 알 수 있을 듯하다.


그는 서울에서 일하던 시절에도 진돗개를 데리고 올라갔다. 낯선 도시의 낯선 공간에서 함께 적응하며 지냈다고 한다. 낯선 곳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그들의 유대는 더욱 깊어졌을 것이다.


진돗개는 집 안에서는 절대 용변을 보지 않아 퇴근 후에는 반드시 산책을 나가야 한다. 그가 함께하지 못할 때는 아내가 대신 데리고 나간다. 그런데 목줄을 쥐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진돗개의 태도는 달라진다. 그가 끌고 나갈 때는 주위를 크게 신경 쓰지 않지만, 아내가 함께 나가면 진돗개의 신경이 예민해진다고 한다.

그가 리드하면 자신이 보호받는 존재라고 여기고, 아내는 자신이 지켜야 할 존재로 인식하기 때문이란다.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과 보호해야 할 사람을 구분할 줄 아는, 예민하고 똑똑하며 충직한 녀석이다.


아침이면 개가 먼저 침실에 와서 자신을 깨운다고 했다. 이불속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혀로 그의 얼굴을 핥으며 아침 인사를 전한단다.


"강아지가 날 깨워. 요즘은 걔 때문에 내가 사는 것 같아."


그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중년이 되면, 삶에서 가장 많이 줄어드는 것이 '반가움'인지도 모르겠다. 사무실에서도, 집에서도, 나를 기다리고 반겨주는 일은 드물다. 온전한 반가움은 사치가 된다.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의 한 자락이 덜 허전해진다.


요즘 개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개를 좋아 하기도 하지만, 나를 진심으로 뜨겁게 반겨주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해서다. 누군가의 기다림 속에 내가 있다는 느낌이 그리워졌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누렁이 한 마리를 잠시 키운 적이 있다. 외조부가 어디선가 데려온 누런 털의 강아지였다. 첫눈에 마음을 빼앗겼고, '페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영어 단어 'PET'이 애완동물을 뜻한다는 것도 모른 채, 그저 어디선가 들은 그 말의 울림에 이끌려 자연스레 그렇게 불렀다.


페트는 나를 유난히 따랐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이면, 골목 어귀까지 나와 나를 기다렸다. 내가 나타나면 꼬리를 흔들며 달려왔고, 옆에 바짝 붙어 집까지 함께 걸었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어머니의 반찬가게에서 "개털이 날려 위생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돌았다. 부모님은 고민 끝에 녀석을 개장수에게 넘기기로 했다.


내가 녀석의 목줄을 개장수에게 넘겼다. 녀석은 내가 자신을 지켜줄 거라 믿었을 텐데, 그 믿음을 저버린 게 가슴 아팠다.


그 후로는 다시는 개를 키우지 않았다. 페트의 마지막 눈빛이 자꾸 떠올라서였다.


요즘은, 외로움이 자주 등 뒤를 따라온다. 그림자처럼 있다가, 불현듯 존재를 드러내는 그것. 옛날 같으면 그냥 넘겼을 말에 마음이 아프고, 흘려듣던 노래에도 눈물이 난다.


이런 변화가 나이 들어가는 증거일까. 단단하던 것들이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곧은 것들이 살짝 휘어지는 과정. 마음의 주름살이 드는 시간. 친구의 눈물처럼, 나도 모르게 스며드는 감정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점점 더 조심스러워진다. 기대보다는 경계가 앞서고, 다가가기보다 거리를 둔다. 그럴수록, 말이 통하지 않아도 마음이 닿는 존재가 그리워진다. 개는 그런 존재같다. 사람의 가면을 벗기는 존재. 말보다 눈빛으로, 논리보다 온기로 다가오는,,,


퇴근하고 돌아온 나를 향해 꼬리를 흔들며 달려와 안기고, 온몸으로 반가움을 표현하는 존재. 그런 존재가 그립다. 페트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 아침, 친구의 눈에 눈물이 맺히던 그 순간이 오래 남는다. 후배가 본 영상 속 진돗개와 주인의 재회가 그의 마음에 깊이 스며들었던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점점 멀어지는 시대, 말보다 침묵이 커지는 나이에 이르러 문득 깨닫는다. 복잡한 인간관계보다 단순하고 깊은 개와의 교감이 때로는 더 선명하게 마음을 채운다는 것을.


누군가의 빈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충직함, 껍데기 없는 진심, 계산 없이 격하게 표하는 반가움.


그 모든 것을 내게 전해주는 존재를 이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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